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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편집국 괴담

 

 

사진=시사IN 제공

 

편집국 괴담

 

 

나는 〈한국일보〉와 〈시사저널〉에서 개성 있는 후배들을 여럿 만났다한국일보 수습기자 후배인 김훈 작가는 그 가운데 유별난  한 사람이다. 설사 그가 현란한 명문으로 《칼의 노래》와 《남한산성》을 써서 낙양의 지가를 올리는 큰 작가가 되었더라도 나는 일선기자 김훈의 모습을 더 친근하게 여긴다.

 

몸 날려 현장 돌진

 

그는 〈한국일보〉 수습기자 29기 출신으로 13기인 나보다 12년 후배다. 내가 사이공 현장에서 승패를 다툴 때 그는 사회부에서  초년 경찰기자로 뛰고 있었다. 그는 나를 두고 이런 대목을 쓴 적이 있다.

“내가 1973년 말 언론사에 갓 입사한 수습기자였을 때, 안병찬 선배는 산전수전의 현장을 갈고 다니던 고참이었다. 그는 철저한 현장주의 기자였고, 엄혹한 트레이너였다. 우리는 그를 따랐고 두려워했으며 부러워했다.

김훈은 청개구리처럼 사표도 안 내고 느닷없이 집에 들어앉기를 여러 번 하였다. 그렇지만 내가 그를 〈시사저널〉 편집위원으로 발탁하자 그는 결코 잔꾀를 부리거나 핑계를 대는 일 없이 즉각 몸을 날려 일선현장으로 뛰었다.

김훈 기자는 원 〈시사저널〉 편집국에 몇 가지 괴담을 남겼다. 그는 스스로 완전한 ‘컴맹’을 고집하고 연필로만 글을 썼다. 연필로 원고를 쓰면 지우개로 고치고 또 고쳐 명문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사를 쓰고 나면 그의 책상 주변은 온통 지우개똥 투성이가 된다.

 

돗자리 깔고 누워 편집국 근무

 

한 번은 내가 편집국 안을 순찰하는데 김훈 사회부장이 책상 밑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목침까지 베고 벌렁 드러누워서 담배를 피고 있다. 아크릴 바닥은 그가 털어낸 담뱃재로 곰보자국투성이다.

내가 편집국 기강 문란이니 당장 돗자리를 걷어치우지 못할까, 하고 엄포를 놓아도 “허리가 아파 앉아서는 일을 못 합니다”하고 꿈쩍도 하지 않는다두 손을 든 것은 편집국장인 내 쪽이었다.

나는 후임 편집국장인 김훈이 연필로 400자 원고지에 꾹꾹 눌러 쓴 환송사를 잊지 못한다. 1996년 내가 원 〈시사저널〉을 떠나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어 환송회가 열린 자리였다. 그는 연필  원고를 들고 일어서더니 읽어 내려갔다.

 

연필로 꾹꾹 눌러 쓴 환송사

 

“……오랫동안 저희들의 기자의 선배이자 생업의 선배이신 안 선배님과 함께, 안 선배님 밑에서 지지고 볶고 또 볶고 끌탕에 끌탕을 거듭하며 살아왔던 세월은 언제나 저와 저의 동료들을 눈물겹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끌탕 속에서도 기자의 자세와 정신으로 다시 주변을 가다듬고 일어나서 〈시사저널〉을 떠받치고 나온 세월들에 대해 저희들은 안 선배님과 함께 자부심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김훈 국장의 말을 인용하는 것은 내가 강조하는 저널리즘의 현장주의와 기사 작성에 있어서의 리얼리즘 정신에 그가 동의하고 그것을 직업의 지표로 인정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초 파동

 

그는 저널리즘의 토양을 거쳐 소설가가 되었다고 자인한다. 이른바 '마초 발언’ 때문에 그가 원 〈시사저널〉 편집국장직을 내던지고 원점으로 돌아갔을 때, 그는 백의종군하며 망설임 없이 이른바  '사쓰마와리(察廻)'(경찰기자)의 길을 선택했다. 그리하여 〈한겨레〉 소속으로 한동안 '사쓰마와리'로 뛴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