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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찬 르포르타주 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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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향 : 역사와 문학의 저널리즘 탐험
by 안병찬

'2017/11'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7.11.02
    편집국 괴담 (1)
  2. 2017.11.01
    나의 추적자 ‘고재열’

 

 

사진=시사IN 제공

 

편집국 괴담

 

 

나는 〈한국일보〉와 〈시사저널〉에서 개성 있는 후배들을 여럿 만났다한국일보 수습기자 후배인 김훈 작가는 그 가운데 유별난  한 사람이다. 설사 그가 현란한 명문으로 《칼의 노래》와 《남한산성》을 써서 낙양의 지가를 올리는 큰 작가가 되었더라도 나는 일선기자 김훈의 모습을 더 친근하게 여긴다.

 

몸 날려 현장 돌진

 

그는 〈한국일보〉 수습기자 29기 출신으로 13기인 나보다 12년 후배다. 내가 사이공 현장에서 승패를 다툴 때 그는 사회부에서  초년 경찰기자로 뛰고 있었다. 그는 나를 두고 이런 대목을 쓴 적이 있다.

“내가 1973년 말 언론사에 갓 입사한 수습기자였을 때, 안병찬 선배는 산전수전의 현장을 갈고 다니던 고참이었다. 그는 철저한 현장주의 기자였고, 엄혹한 트레이너였다. 우리는 그를 따랐고 두려워했으며 부러워했다.

김훈은 청개구리처럼 사표도 안 내고 느닷없이 집에 들어앉기를 여러 번 하였다. 그렇지만 내가 그를 〈시사저널〉 편집위원으로 발탁하자 그는 결코 잔꾀를 부리거나 핑계를 대는 일 없이 즉각 몸을 날려 일선현장으로 뛰었다.

김훈 기자는 원 〈시사저널〉 편집국에 몇 가지 괴담을 남겼다. 그는 스스로 완전한 ‘컴맹’을 고집하고 연필로만 글을 썼다. 연필로 원고를 쓰면 지우개로 고치고 또 고쳐 명문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사를 쓰고 나면 그의 책상 주변은 온통 지우개똥 투성이가 된다.

 

돗자리 깔고 누워 편집국 근무

 

한 번은 내가 편집국 안을 순찰하는데 김훈 사회부장이 책상 밑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목침까지 베고 벌렁 드러누워서 담배를 피고 있다. 아크릴 바닥은 그가 털어낸 담뱃재로 곰보자국투성이다.

내가 편집국 기강 문란이니 당장 돗자리를 걷어치우지 못할까, 하고 엄포를 놓아도 “허리가 아파 앉아서는 일을 못 합니다”하고 꿈쩍도 하지 않는다두 손을 든 것은 편집국장인 내 쪽이었다.

나는 후임 편집국장인 김훈이 연필로 400자 원고지에 꾹꾹 눌러 쓴 환송사를 잊지 못한다. 1996년 내가 원 〈시사저널〉을 떠나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어 환송회가 열린 자리였다. 그는 연필  원고를 들고 일어서더니 읽어 내려갔다.

 

연필로 꾹꾹 눌러 쓴 환송사

 

“……오랫동안 저희들의 기자의 선배이자 생업의 선배이신 안 선배님과 함께, 안 선배님 밑에서 지지고 볶고 또 볶고 끌탕에 끌탕을 거듭하며 살아왔던 세월은 언제나 저와 저의 동료들을 눈물겹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끌탕 속에서도 기자의 자세와 정신으로 다시 주변을 가다듬고 일어나서 〈시사저널〉을 떠받치고 나온 세월들에 대해 저희들은 안 선배님과 함께 자부심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김훈 국장의 말을 인용하는 것은 내가 강조하는 저널리즘의 현장주의와 기사 작성에 있어서의 리얼리즘 정신에 그가 동의하고 그것을 직업의 지표로 인정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초 파동

 

그는 저널리즘의 토양을 거쳐 소설가가 되었다고 자인한다. 이른바 '마초 발언’ 때문에 그가 원 〈시사저널〉 편집국장직을 내던지고 원점으로 돌아갔을 때, 그는 백의종군하며 망설임 없이 이른바  '사쓰마와리(察廻)'(경찰기자)의 길을 선택했다. 그리하여 〈한겨레〉 소속으로 한동안 '사쓰마와리'로 뛴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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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학 산공 2017.11.05 05:09 address edit/delete reply

    현장 주의자, 안깡 님, 후배들에게 훌륭한 자세를 보여 주었습니다.




 

 

 

나의 추적자 ‘고재열’

 

원(原) 〈시사저널〉시절부터 〈시사IN〉시절에 걸쳐 나를 추적하며 먹잇감으로 취재하거나 부려먹은 젊은 기자 한 명이 있다. 그 추적자는 정치·문화기자 고재열이다.

그는 고집은 가슴속에 감추고 겉은 수줍은 체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는 친구다. 또 예민한 시각으로 세상을 쏘아보는 친구다.

20032월 어느 날, 〈시사저널〉 편집고문실로 문화부 기자 고재열이 올라왔다. 당시 나는 경원대학교에서 언론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시사저널〉 고문을 겸직하고 있었다.

 

인터넷 성감대 

 

뛰어난 인터넷 전문기자인 고재열은 인터넷 문화의 ‘성감대’를 주제로 특집을 기획하고 내 글을 받아 싣겠다고 한다. 기자 출신의 언론학자로서 50․60세대를 대표하여 인터넷을 서핑한 후에 그 순행기(巡行記)를 써달라고 강력 하게 주문한다. 그의 강청에 마지못해 내가 써낸 인터넷 관전평은 『만화경, 혹은 감각의 제국』이라는 제목을 달고 고재열의 특집을 뒷받침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20042월 어느 날, 고재열이 다시 내 방에 나타났다. 그달에 개봉한 강제규 감독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가 대박을 내고 있을 때다. 내가 6·25전쟁으로 아버지와 영영 생이별한 분단가족인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태극기 휘날리며’의 영화평을 써달라고 주문한다.

 

태극기 휘날리며

 

‘태극기 휘날리며’는 6·25전쟁 전후의 서울 공간을 실감나게 되살려놓고 있었다. 초여름의 햇볕 아래 전차가 다니는 서울의 거리 정경은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슬픈 공간이었다. 그는 나의 영화평에 『가슴 파고든 그 여름 서울 풍경』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는 명민했다. 2007년 〈시사IN〉 초기에 경영이 매우 어려워 세 끼니 밥 먹을 임금도 받기 힘들던 시절이었다. 그는 한국방송(KBS)의 생방송 ‘퀴즈 대한민국’에 나가더니 장원을 해서 상금 2,000만원을 획득하여 화제를 뿌렸다. 그 돈으로 그는 배곺은 처자를 공양하는 데 썼다고 우스개로 말했다.

 

세력가 독설닷컴

 

고재열 기자는 ‘몽골기병’(내가 원 시사저널 기자들에게 붙인 별칭)의 한 명으로 〈시사IN〉 창간에 가담했다. 고재열은 부업으로 소셜뉴스를 개척하여 강력한 블로그 ‘독설닷컴’의 운영자가 되었다. 당시 추종자 257,000명을 이끄는 막강의 ‘트위터독설’도  겸영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 인터넷 세계에 몇 안 되는 최강자였다.

 

'since1962.tistory.com' 내력

 

그는 나에게 블로그 'since1962.tistory.com'를 작명하고 구축해 주었다. 1962년부터 〈한국일보〉에서 기자직을 개시했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그덕에 나는 일찌감치 블로그의 선진으로 행세를 할 수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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