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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한국해군 연쇄비극 떠오른다


[천안함 침몰에]

1967년 1월의 연쇄 비극

충남함과 한일호 충도,

당포함 피격침몰 떠올라

 

43년 전 1967년 1월 15일 아침, 용호상박의 싸움을 하던 두 조간신문 간에 희비가 크게 갈렸다. 한국일보 편집국에 침통한 곡성이 울리고 조선일보 편집국에 득의양양한 개가가 울렸다.

조선일보 일면은 한국함대 동해경비분대 소속 초계정 당포함이 북한 동굴 포대의 집중포화에 탄약고를 맞아 침몰하는 비장한 최후의 사진이 장식하고 있었다.

 

충남함에 중과실

그해 1월은 한국해군에게 흉사가 겹쳐 가장 비극적인 한 달로 기록 되었다.

1월 14일 밤 9시 15분, 진해만 가덕도 수로에서 2300톤급의 해군호위구축함 충남호가 140톤급의 여객선 한일호와 충돌했다. 한일호는 침몰하고 민간인 승객과 승무원 94명이 떼죽음을 당했다.

한일호 선체는 해군특수전대(UDT)가 해저 30미터 갯벌에 있는 것을 발견했으나, 그때도 파도와 추위로 인양작업이 지연됐다. 전국의 보도진이 진해에 집결한 가운데 해군참모총장 김영관 제독(훗날 월남주재 최후의 한국대사)은 현장에서 사고수습을 진두지휘를 하고 있었다.

사고가 나고 6일 만인 19일 하오에 침몰한 한일호는 해군 크레인선이 인양했다. 당시 해군당국은 충남함은 받지 않고 받쳤다고 주장했으나, 부산지방해난심판위원회는 충남함이 갑자기 변침(침로변경)했으므로 해상충돌예방법에 따라 충남함에 중과실이 있다고 판단했다. 나는 해운 전문가들에게 물어 ‘충남함 중과실’을 확인하여 단독으로 보도했다.

 

당포함의 침몰

진해만에서 한일호가 물위로 끌려올라오던 시간에, 동해 북방한계선 부근에서 650톤 급 해군초계정인 당포함이 불기둥을 일으키며 침몰하고 있었다.

북한군 해안 동굴진지와 교전하며 286발의 집중 포격을 받고 탄약고를 얻어맞은 것이다. 해군 승무원 79명 중 40명 생환, 39명 전사 및 실종.

진해에서 한양호의 인양작업 현장을 지키던 김영관 해군참모총장은 당포함 피격침몰의 긴급보고를 받자 71함을 몰아 동해 현장으로 향했다. 떠나기 직전에 그는 진해에 몰려있던 기자단에게 “당포함이 침몰 당했으니 현장으로 가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 기자들은 의심했다. 중과실이 있는 충남함에서 눈을 떼게 하자는 계산이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모두 인양이 끝난 한일호 취재에 매달렸다.

 

<당포함 침몰 사진>

 

윤병해 기자만 동승

그날 단 한 사람 윤병해 기자(현 미국 뉴욕거주, 당시 조선일보 국방부 출입)만 김영관 해군총참모장을 좇아서 71함에 올랐다.

동해 현장에 도착한 김영관 해군참모총장은 구조함에서 한 병사가 당포함 침몰장면을 찍은 사진 필름을 접수하자 “옛다, 윤 기자, 이거나 신문에 내지!”하며 선선히 넘겨주었다.

윤병해 기자가 일생일대의 특종을 거머쥐던 순간이다.

 

후일담

당시 나는 잠시 한국일보를 떠나 중앙일보에 가 있던 때여서 윤병해 기자의 특종 일격으로 초상집이 된 한국일보에서 낙종의 아픔을 겪지 않아도 되었다.

백령도 앞 해저에 가라앉은 천안함 함미에 줄을 연결하던 3월 30일 저녁에 나는 김영관 전 해군참모총장 겸 전 월남주재 최후대사에게 전화를 걸어서 오래간 만에 인사를 나누고, 1967년 1월에 충남함과 한일함이 충돌하고, 당포함이 피격침몰하고, 윤병해 기자가 특종을 한 사연을 다시 확인했다. 86세가 된 김영관 전 대사는 아직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응답했다.

나는 1975년 3월에 패망을 눈앞에 둔 사이공에 특파되었을 때 김영관 대사를 처음 알게 되었고, 최후의 날 하루 전인 4월 29일 오전까지 그와 접촉했었다.

 

- 여객선 한일호와 구축함 충남함(73함) 충돌 보도(1967년 1월 16일자)


- '73함(충남함) 중과실' 보도(1967년 1월 17일자)

 


- 해군 56함(당포함) 침몰 보도. 왼쪽 사진은 인양한 한일호 선체.(1967년 1월 20일자)


-  당포함 침몰 사진(1967년 1월 21일자)

 


- 필자의 저서 <사이공 최후 표정 컬러로 찍어라> 출판기념회에서 축사를 하는 김영관 전 대사(2005년 4월)

 

2010년 3월 31일 새벽에 

                                               posted by 안병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