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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만에 다시 탄 베트남 통일열차 '오디세이'


[베트남 통일열차-2]

 베트남 통일열차 ‘오디세이’

베트남 통일 35주년을 맞아 <시사IN>이 1박2일간 베트남열차에 탑승했다.

 

호찌민/글. 사진 표완수 기자

 

20년 만의 베트남 통일열차 탑승 취재다. 1990년 12월에는 나 혼자였으나, 지금은 당시 편집국장이던 안병찬 선배(언론학 박사. 전 한국일보 ‘사이공의 최후’ 특파원·전 <시사저널> 발행인 겸 편집인. 현 언론인권센터 이사장)와 동행이다. 당초에는 국제팀 신호철 기자와 안 선배가 함께 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취재 계획이 안 선배의 저녁식사 자리에서 바뀐다. 무심코 던진 그의 말에 부인 이정자씨(여성정치포럼 대표)가 특유의 족집게를 들이댄 것이다. “표완수씨가 가야지요. 20년 전에 표완수씨가 통일열차 타지 않았나요?” 안 선배는 저녁밥을 입에 문 채로 나에게 전화했다. 70대 베테랑 대기자와 60대 어정쩡한 기자의 ‘베트남 통일열차 기행’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하노이 역 출발 직전의 표완수 시사IN 발행인(왼쪽)과 안병찬 언론인권센터 이사장. ⓒ시사IN 표완수

 4월25일 현지 시간 밤 10시40분. 네 시간 반을 야간비행한 끝에 마침내 하노이 공항에 도착. 시차 2시간을 감안하면 서울은 자정을 40분 지난 시각이다. 한밤중인데도 아열대 밤기운이 훅 끼치는 것처럼 느껴진다. 착륙 전 내려다본 하노이 공항 야경은 예상대로 불빛이 절제된 곳. 20년 전과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비행기 화물칸에 부친 가방을 찾으면서 옛날과 크게 달라진 하노이 공항을 실감한다. 엉뚱한 곳에서 10분 동안 짐 나오기를 기다렸던 것. 우리뿐 아니라 많은 외국인이 똑같이 그랬다. 공항 직원의 안내가 아니었다면 한참을 그렇게 기다리고 있을 뻔했다. 20년 전 하노이 공항은 한마디로 한가하고 쓸쓸했는데…. 조잡한 공산품 몇 가지만이 뽀얗게 먼지가 앉은 채 자물쇠 채워진 진열대 속에서 잠자고 있었고, 그 앞에서 공항 여직원들이 양푼이나 대야 같은 것에 담긴 과일과 초록색 나무열매를 저울에 달아 팔고 있었다.

지우찌 역에서 역무원이 통일열차를 점검하는 모습 ⓒ시사IN 표완수

 

그러나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여행가방을 찾아 끌고 입국심사대를 거쳐 영접 나온 인사들과 만나는 과정이 여느 국제공항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사람들도 누가 베트남 사람인지, 누가 한국 사람인지, 누가 중국 사람인지 물어보지 않고는 알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그때는 베트남 측 초청장이 없으면 아예 이 나라를 방문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당시 베트남 측 여행사의 초청장을 받았던 나는 우리나라 정부기관에서 여행에 필요한 소양교육, 이른바 반공교육을 받고 나서야 출국이 가능했다. 비행기 편도 지금은 하루 몇 차례 직항이 있지만, 그때는 양국 간 국교가 없는 상황에서 직항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나는 타이 방콕의 돈무앙 공항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호찌민에 들어갈 수 있었다.

 

 


 

목적지의 날이 흐리다는 기내 안내방송 때문에 혹시 비가 오지 않나 걱정했으나, 날이 좋아 다행이다. 공항에 마중 나온 하노이의 한국 교민잡지 <윈도 온 베트남>의 유명호 발행인은 저녁 무렵 비가 좀 내리다가 그쳤다고 알려준다. 하노이 공항에서 동포 교민의 차량 지원을 받으면서 새삼스레 그간의 변화를 실감한다. 이번 통일열차 취재는 베트남 통일 35주년(4월30일)을 맞아 분단 한국의 나이 든 언론인 둘이 취재에 나섰다는 의미도 있지만, 옛날의 편집국장과 국제부장이 공조 취재한다는 점도 두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특히 나로서는 20년 전, 당시 2박3일간 호찌민에서 하노이까지 여행하며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도민투안
부부를 직접 찾아 나선다는 점 때문에 더욱 가슴 뛰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노이 대우호텔에 들어서니 시설과 분위기가 세계 어느 곳에 있는 일류 호텔에 비해도 손색이 없다. 방에 들어서면서 우선 인터넷 선부터 확인한다. 노트북을 꺼내 직접 연결한다. 안 선배도 기사 송고, 특히 사진 송고 때문에 신경이 많이 쓰이는지 직접 체크하면서 자신의 이메일 박스도 열어본다. “야, 서울보다 더 빠르다!” 그의 기분 좋은 일성.

카페 프롬나드의 지배인 응오민투이(왼쪽)와 이야기를 나누는 표완수 기자. ⓒ안병찬

 

20년 전 그 부부를 다시 만나다

20년 전 투안의 소개로 이곳 하노이에서 잡은 숙소는 호아빈 호텔이었다. 그 호텔에서 나는 정말 다른 세상에 와 있음을 실감했었다. 프랑스풍의 호텔 건물은 뼈대만 근사했다. 흰색 건물에 천장이 높고 아치 장식이 많았다. 방이 매우 넓고 욕실도 방의 절반 크기는 돼 보였는데, 모든 시설이 그렇게 낡을 수 없었다. 녹슬고 삭은 비누받침대 위에 싸구려로 보이는 작은 분홍색 비누 하나, 수세식 변기 옆에 누런 두루마리 화장지 한 개, 수건 하나. 소비제품이 참 귀한 곳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4월26일 아침. 어떻게 도민투안을 만날까. 어젯밤 유 대표는 그 이름을 모른다고 했다. 어떻게 그의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 호텔 뷔페식당 ‘카페 프롬나드’에서 아침에 만난 매니저 응오민투이가 영화감독 도민투안의 이름을 안다고 했을 때 ‘아, 이제는 만날 수 있겠구나’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옛날에 영화감독 초년생이라던 그가 지금은 베트남의 유명 영화감독이 되었나보다. 20년 전 그가 말한 대로 그는 정말 영화를 좋아했고, 줄곧 영화 제작에 전념했었나보다.

오후 4시에 투안이 호텔로 나를 픽업하러 왔다. 호텔 라운지에서 벌어진 20년 만의 재회. 나이 덕인지 옛날 광대뼈가 두드러졌던 얼굴은 보기 좋게 살이 올라 있다. 강렬하고도 마음씨 섬세했던 부인의 안부가 궁금했으나, 근엄하고 인자해 보였던 부모님 안부부터 묻는다. 어머니는 몇 년 전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자신이 모시고 산다고. 네 살배기였던 딸 링아는 파리의 대학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한 뒤 지금은 대학원에서 마케팅을 전공하고 있단다. 우리가 만났던 몇 년 뒤 아들을 낳아 지금 중학교에 다니고 있고. 영어 발음에서 마지막 자음을 생략하는 것은 옛날과 똑같다. 지금도 ‘어바웃’(about)에서 ‘t’를 생략해 ‘어바우’라고 한다. 영어를 사용할 기회가 많았을 텐데 발음 고치기가 힘든가보다.  양해를 구한 뒤 안 선배와 함께 간다고 하니 자기도 한국말 하는 친구 한 명을 부른다. 호텔에서 10여 분 만에 도착한 그의 집은 5층. 콘도미니엄 식이다. 20년 동안 강렬한 이미지가 나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은 부인 왕킴완. 세월의 그림자가 살짝 그녀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20년 전 호찌민 시에서 하노이행 통일열차 표를 사기 위해 투안이 사이공 역에 간 동안 완과 나는 인근 노천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며 그를 기다렸다. 마주앉아 있던 그녀가 갑자기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겨 바싹 다가앉았다. 내가 외국인인 것을 사람들이 알고 모여드는 것 같다는 것. 그녀가 베트남어로 뭐라 말하고, 나는 알아듣는 척 고개를 끄덕였었다. 차를 마시면서 우리는 그때 통일열차 탑승기를 커버스토리로 다루었던 잡지를 보면서 옛 이야기에 젖는다. 나의 기억력에 투안과 완이 놀라고, 그들의 기억력에 내가 연방 감탄한다. 특히 “한국이 베트남에 잘못하고 있다” “참전 말이냐” “인삼 말이다” “…?” “베트남의 늙은 지도자들이 한국 인삼을 먹고 오래 살아 개혁이 안 된다!” 우리는 눈물이 나도록 웃는다.

 

표완수 기자(오른쪽)가 20년 전에 쓴 통일열차 기사를 보는 투안 부부. ⓒ안병찬

 

한국 인삼 때문에 베트남 개혁이 안 된다?

투안의 집 1층은 주방과 식당, 2층은 거실, 3층 침실 2개는 아버지와 장모가 사용하고, 4층 침실 2개는 부부와 아들이 사용한다. 5층은 투안의 서재. 서재라기보다 책과 그림을 두는 창고라고 강조한다. 20년 전 베트남 북부지방의 전통가옥에 살던 때와 비교하면 투안 가정의 생활양식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베트남 북부 전통가옥에는 방에 문이 없고 벽도 절반만 막혀 있었다. 아버지가 친척집 일 때문에 집에 안 계셔서 투안 부부와 장모, 투안의 친구 리테봉과 함께 20년 만의 만찬. 손이 민첩한 ‘명요리사’ 완이 준비한 음식을 포식한다. 월남쌈을 기름에 튀긴 것 같은 냄, 음력 3월3일에 먹는 반쪼이, 닭튀김을 다른 채소들과 섞은 무아이몬찌앤, 탕면 종류인 미앤나우 등등.

식사 후 거실에 올라가 차를 마시며 다시 옛이야기가 계속된다. 투안은 그동안 영화뿐 아니라 소설·그림·평론 등 여러 분야에서 많은 문제 작품을 남겼다. 낭트 영화제·아시아태평양 영화제 등에 초대받았다. 파리와 싱가포르에서 그림 개인전도 열었다. 대표작으로는 영화 <쓰레기대왕>(King of Rubbish Dump), 저서 <성자와 나비>(Saint and Butterfly) 등이 있다. 늦은 밤, 인터넷으로 소식 전하길 약속하고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눈다.

1박2일 하노이를 스케치하면서 든 생각. 2010년의 하노이는 내가 본 1990년의 호찌민 시 모습을 꼭 빼닮았다. 거리마다 사람들이 넘쳐난다. 거대하게 움직이는 오토바이 행렬은 도시 전체가 하나의 살아 있는 기관임을 과시하는 것 같다. 모든 사람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도처에 활기가 흐른다. 20년 전의 하노이는 완전히 달랐다. 도시 전체가 근엄해 보였다. 거리에는 많지 않은 사람이 꼭 필요한 일상의 일들을 해나가고 있었다. 절제된 도시라는 느낌이 강했다. 먼지가 뽀얗게 앉은, 오래도록 방치된 도시 같았다. 그때, 호찌민 시가 하늘하늘한 아오자이(베트남 여성의 민속 옷)의 여성이었다면, 하노이는 카키색 군복과 무캇 모자(국방색 모자로 등나무로 만듦)의 남성이었다. 이제 하노이에서도 아오자이를 입은 여성들이 많이 눈에 띈다.

4월27일 낮 12시25분. 시내 곳곳을 스케치한 다음 하노이 기차역에서 통일열차를 타고 호찌민 시로 향한다(통일 후 사이공이 호찌민 시로 이름을 바꿨으나 역 이름은 지금도 공식적으로 ‘사이공 역’이다). 통일열차는 출발역, 정차역, 운행시간 등에 따라 모두 10종(SE1~SE8과 TN1, TN2)으로 구분된다.

하노이 역 출발~사이공 역 도착이 홀수(SE1, SE3 등), 사이공 역 출발~하노이 역 도착이 짝수(SE2, SE4 등). SE3 편과 SE4 편이 가장 빨라 29시간30분 걸리고, 우리가 탄 SE5가 31시간35분, SE6가 31시간40분 걸리는 것으로 시간표에 나와 있다. 가장 오래 걸리는 TN2는 41시간25분이 소요된다. 20년 전 투안 부부와 사이공에서 하노이로 가는 데 꼬박 48시간 걸렸던 데 비하면 많이 단축되었다. 2박3일이 1박2일로 줄어든 셈이다.

 


하노이 시는 거리마다 사람이 넘쳐나고 활기가 넘친다. 위는 하노이 중심가를 누비는 오토바이 행렬. ⓒ시사IN 표완수

 

안 선배는 대우호텔에서 서비스로 준 각종 과일을 모두 챙겨 나왔다. 나는 노트북 가방과 여행가방을 들고 11호 객차 17·18번 좌석을 찾아 4인용 침대칸으로 들어간다. 아니, 이게 웬일인가. 우리 좌석 중 하나를 어느 노인 부부가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베트남의 열차는 대체로 유럽식이다. 우리처럼 객차 중앙에 통로가 있는 게 아니고, 객차 한쪽에 좁은 통로가 길게 나 있고, 나머지 공간이 7개의 침대칸으로 나뉜다. 침대칸은 양쪽에 긴 의자가 마주보고 있어 승객이 2인씩 서로 마주앉게 된다. 1층의 긴 의자 위쪽 벽에 2층의 긴 의자가 부착돼 있다. 승객 4인이 2인씩 서로 마주보고 있다가 밤이 되면 2층 좌석표를 가진 승객 둘이 위로 올라가 잠을 잘 수 있는 시스템이다.

1층 긴 의자 2개가 17·18번 좌석으로, 안 선배와 내가 누워 쉴 수 있는 자리. 그런데 이미 할아버지 한 분이 18번 자리에 누워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이불을 쓰고 누워 있고, 할머니가 나와 안 선배에게 베트남말로 계속 뭐라고 말한다.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무슨 뜻인지는 금방 알아차릴 수가 있다. 난감한 일이다.


‘룸메이트’인 짱이 딸 짜미에게 기침약을 먹이고 있다. 오른쪽은 투아이 할아버지.ⓒ시사IN 표완수

 

아픈 노인 위해 최선 다하는 승무원과 승객들

잠시 후, 객차 승무원이 우리 자리에 와서 뭐라고 열심히 설명을 한다. 할아버지는 나이가 많고 몸이 아파 윗자리로 올라갈 수 없으니 자리를 바꿔달라는 것이다. 딱하지만, 우리로서도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바닥에 고정돼 있는 작은 식탁 위에 이런저런 자료를 펼쳐놓고, 취재작업도 하고 사진 촬영도 해야 하는데 자리를 바꿔달라니…. 한 사람이 20번 좌석인 윗자리에 올라가면 거기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식탁 위에 자료를 펼쳐놓고 일을 해야 한다고 몸짓으로 설명을 하니 나중에는 어디선가 한국 말을 조금씩 떠듬거리는 여자 승무원을 데려온다. 역시 예상한 대로다. 할아버지가 83세로 나이가 많고 몸이 아파 거동이 어렵다, 할머니가 74세인데 옆에 붙어서 시중을 들어줘야 한다, 그러니 자리를 바꿔달라는 것이다.

그때 안 선배가 통 크게 대답을 해준다. 낮에는 자신이 창가에 앉아 일을 해야 하니 어쩔 수가 없고, 밤에는 위쪽 자리를 사용하겠다, 그러니 낮 동안에는 그 옆에 그냥 누워 있으라고. 노인 두 분이 두 손을 모아 감사 표시를 한다. 승무원과 다른 승객들도 모두 감사를 표시한다. 2층 19번 좌석은 네 살 된 딸아이를 데리고 있는 27세의 젊은 엄마다. 이러다보니 4인용 침대칸에 6명이 앉게 된 것. 이렇게 31시간 넘게 가야 한다.

정확히 낮 12시25분에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노인의 아들도 나가고, 다른 배웅객들도 모두 빠져나가니 차 안이 이전보다 조용해진다. 그러나 시끄러운 소리는 그치지 않는다. 열차가 본격적으로 달리자 삶은 달걀, 음료수 몇 종류, 과자, 초코파이 등을 판매하는 여자 판매원이 카트를 밀면서 큰 소리로 뭐라고 외친다. 바나나 잎에 싸인 밥을 파는 판매원이 그 뒤를 따른다. 철길과 나란히 달리는 1번 국도에 ‘로얄 드림관광’이라는 한글이 쓰인 최신형 관광버스가 지나간다.

 

베트남 통일열차에서는 달걀·음료수·과자·초코파이·밥 등을 판다. 위는 식당칸 매점 모습. ⓒ시사IN 표완수

 
현대건설 마크가 선명한 대형 공사차량이 지방도로를 달리는 광경도 눈에 들어온다. 산과 들, 소와 오리들이 연출하는 시골 풍경은 바뀐 게 없으나 철도 연변의 도로 풍경은 20년 전과 사뭇 다르다. 이전에는 낡은 트럭, 낡은 버스들이 어쩌다 눈에 들어왔을 뿐이었다. 낡은 버스 지붕 위에는 많은 짐이 실려 있었다. 지금은 그런 버스를 볼 수가 없을뿐더러 각종 차량도 대체로 새것으로 보인다.  

우리와 룸메이트가 된 노인 부부가 자신들을 소개한다. 할아버지는 투아이, 할머니는 부이라고. 하노이에 사는 아들을 보러 왔다 돌아가는 길. 호찌민 시 바로 못 미쳐 비엔호아에서 내린다고 한다. 할머니가 플라스틱 가방에서 먹을 것을 꺼내 할아버지에게 먹이면서 우리에게도 권한다. 우리가 사양하자 자신도 음식을 먹기 시작한다. 바나나 잎으로 싼 밥을 노인들은 ‘소이넵’이라고 말한다. 나중에 한국말을 하는 여자 판매원 딘(30)에게 물어보니 그녀는 그것을 ‘산’이라고 소개한다. 내용물에 따라서 이름이 달라진다고 설명한다.

 

통일열차는 4월27일 낮 12시25분 하노이에서 출발해 28일 밤 8시40분께 사이공 역에 도착했다. 위는 통일열차에서 사진 취재를 하는 안병찬 기자. ⓒ시사IN 표완수


부이 할머니는 남편에게 끔찍이 잘 한다. 음식 먹는 것을 도와주고, 물을 먹여주고, 바닥에 흘린 음식물을 치워준다. 식사를 끝낸 뒤에는 비닐봉지에서 후식을 꺼내 할아버지에게 먹이면서 굳이 우리에게도 먹어보라고 권한다. 사양했으나 강권하는 바람에 하나를 받아든다. 돼지감자를 깎은 것인가 생각하며 한입 맛을 보니 사탕수수다. 껍질 벗긴 사탕수수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비닐봉지에 담아온 것. 할머니는 그것을 ‘므어이’라고 설명한다. 할아버지가 식사를 끝내자 할머니는 물수건으로 할아버지의 입과 얼굴을 닦아준다. 그렇게 정성스럽고 극진할 수가 없다.

할머니뿐 아니라 베트남 사람들은 대체로 인정이 많은 것 같다. 처음 열차에 올랐을 때 노인 두 분의 사정을 설명하고 사정하는 베트남인들의 마음에 내심 적이 놀랐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진정성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는 게 과시형에 가까운 우리와는 많이 달랐다.

한국말을 할 줄 아는 딘은 1박2일 동안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된다. 아기를 하나 둔 그녀의 남편은 하노이에서 대형 건물을 짓는 한국 기업에서 일한단다. 하노이의 강남으로 불리는 신도시 지역에 70층짜리 랜드마크 빌딩을 짓는 K사의 현장에서 일한다고. 철도 객차 판매원 생활 3년째인 그녀의 꿈은 서울에 가는 것이다. 우리에게 서울에 갈 수 있게 해달라고 통사정을 한다.



통일열차에서는 컵라면을 사서 먹을 수도 있다. 위는 통일열차 식당칸 내부 모습.ⓒ시사IN 표완수


기차 안에서 계속되는 놀라운 일들

예정시간에 맞춰 오후 1시28분 푸리 역에 도착한 열차가 2분 뒤 출발하자 베트남 북부의 전형적 농촌 풍경이 펼쳐진다. 논에 벼가 한창 자라기도 하고 이미 벼이삭이 팬 곳도 있다. 소들이 여기저기서 풀을 뜯는 모습이 많이 보이는 것도 20년 전과 똑같다.

판매원이 지나갈 때 베트남 컵라면 2개를 산다. 객차 복도 앞쪽에서 뜨거운 물이 나온다고 한다. 안 선배와 1박2일 동안 가능하면 식사는 소식을 하기로 합의한다. 먹으면 배설해야 하는데 화장실이 너무 지저분하다. 옛날에 비하면 격세지감이 들 정도로 시설은 좋아졌다. 그때는 화장실에 물도 안 나왔지만, 지금은 물이 잘 나온다. 다만, 이용자들이 아무렇게나 사용한다. 음식물 쓰레기를 변기에 버리기도 한다. 아이들 소변은 변기가 아니라 세면기 안에 뉜다. 

열차는 남딘, 닌호아를 거쳐 3시45분 탄호아에 들어선다. 공동묘지 옆 동네 축구장에서 축구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탄호아 역은 어느 역보다도 깨끗한 인상이다. 향나무 등이 잘 단장되어 있고, 분홍색 부겐비아 꽃이 아름다운 곳. 3분 쉬고 출발한다. 정차시간 동안 역무원들은 물을 채우고, 안전 점검을 한다. 탄호아를 지나자 연도 양편으로 끝없이 논이 펼쳐진다. 땅콩밭이 자주 눈에 띄고, 물소처럼 뿔이 길게 난 소들이 들판에 많이 보인다. 남쪽으로 갈수록 벼가 고개를 숙인다.

오후 6시가 지나면서 해가 어스름해진다. 맞은편 자리의 노인 두 분이 자리에 눕는다. 내 윗자리의 젊은 엄마 짱(27)도 어린 딸 짜미(3)를 데리고 누웠는지 조용하다. 안 선배가 노인들의 윗자리, 그러니까 짱의 맞은편 2층 자리로 올라간다. 사다리가 있는 것도 아닌데 날렵한 몸놀림이다. 복도 문 양옆 벽 중간 높이쯤에 손바닥 절반만한 쇠판이 붙어 있는데, 평소에는 덮어뒀다가 위에 올라갈 때 사용한다. 그것을 열어젖힌 뒤 밟고 올라가는 것.

“안 선배, 타잔놀이 잘하시네요. 막 날아다니시는 게 대단하십니다!” 안 선배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과 환한 웃음이 동시에 퍼진다.

내 디지털카메라에 갑자기 경고 메시지가 뜬다. 전지를 교체하라는 내용이다. 배터리가 다 되었으니 충전을 하라는 뜻이다. 혹시 노트북에 있는 배터리 전력을 카메라로 이동시킬 수 있는지 시험해보기로 한다. 헛수고다. 본사에 전화해서 알아볼까. 미술부 이정현 기자에게 휴대전화로 통화를 시도한다. 신호가 간다. 그가 전화를 받는다. 아, 통일열차에서 서울로 휴대전화 통화가 되는구나! 이 기자는 전력 이동은 안 된다고 말했지만, 통일열차에서의 휴대전화 통화 덕에 실망감은 그래도 누그러진다.

혹시나 하고 차장에게 열차 안에서 충전이 가능하냐고 물어본다. 뜻밖에도 차장은 친절하게 충전하는 곳을 알려준다. 기대하지 못했던 놀라운 일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 충전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긴 했지만, 그래도 비상 상황을 벗어날 수 있어서 마음이 놓인다.

오후 6시5분에 빈 역을 뒤로한 채 동호이를 향해 출발한다. 요란한 풀벌레 소리가 아련하게 뒤로 멀어진다. 하노이에서 호찌민 시까지 가는 동안 빈-동호이 구간이 가장 길다. 동호이 도착 예정이 밤 10시1분이니 약 4시간을 논스톱으로 달려야 한다.

벼르고 별렀던 하이반 협곡 촬영 실패

오후 7시가 조금 지나자 열차 안이 조용해진다. 모두 침대에 누웠거나 문을 닫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것이다. 나도 침대에 몸을 누인다. 노트북·카메라 등이 모두 쉽게 눈에 띄는 곳에 있는데 문을 잠글까 말까 망설인다. 문을 닫고 잠그지는 않는다. 문을 닫고 누우니 천장에서 나오는 에어컨 바람이 갑자기 차갑게 느껴진다. 체온조절에 신경을 많이 쓰는 안 선배가 괜찮을까. 올려다보니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있다.

옛날에는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없었다. 투안이 부채를 사서 건네줬던 일이 엊그제처럼 생각난다. 그때는 문을 잠그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유리가 없으니 잠금장치가 무슨 소용인가. 투안이 어디선가 끈을 찾아내 문 손잡이를 안쪽 물건걸이에 단단히 잡아매었다. 그가 왜 그렇게까지 신경을 썼을까? 물론 카메라 등 나의 물건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후 8시20분쯤. 열차가 속력을 줄이더니 멈춰 선다. 열차시각표에 나와 있지 않은 정차다. 몇 분이 지난 뒤 다른 열차 소리가 들려오더니 빠르게 우리 열차를 지나간다. 그러자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밤 10시10분, 예정보다 9분 늦게 열차가 동호이 역에 도착한다. 여기서는 10분을 정차하니 내려가서 사진 취재도 하고 먹을 것도 좀 사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안 선배와 사진 몇 장을 찍고 즐비하게 늘어선 상점에서 꼬마 바나나 한 덩어리와 컵에 든 쌀라면을 산다. 열차에 올라 뜨거운 물을 받아 라면과 바나나로 저녁을 해결한다. 열차는 10시16분에 역을 출발해 고도 후에를 향해 달린다.

안 선배가 2층 자리에 누우면서 부탁을 한다. 후에로 가는 도중에 우리가 탄 열차가 서지는 않지만, 동하라는 곳이 나올 테니 동하강 철교가 나올 때 미리 깨워달라는 것. 나는 그 부탁을 들어주지 못한다. 강이라기보다 약간 큰 시냇물 같은데, 짧은 철교를 순식간에 지나쳐버렸기 때문이다. 1975년 봄 종군기자 시절 베트남의 허리를 자른 북위 17° 선상의 그곳에서 그가 북베트남군의 포 공격을 가까스로 피해 목숨을 건진 일이 있다는 이야기를 나는 나중에 듣게 된다. 열차는 동하 시내를 관통한다. 철로 변에 주택이 즐비하게 머리를 잇대고 있다.

새벽 1시가 조금 지난 시각 열차는 후에에 도착한다. 내려가서 사진 취재를 해보지만, 역사를 제대로 잡을 수 없다. 11호 객차의 위치가 매우 불리하기 때문이다. 빈-동호이 구간에서 만난 벨기에 커플 사비와 미셸은 이곳에서 내린다. 휴가차 베트남을 찾은 그들은 자신들이 커플이기는 하지만 결혼하지는 않았다고 강조했다.

하이반 협곡을 사진에 담으리라 벼르고 별렀는데, 불행한 일이다. 깜깜한 밤중, 그것도 새벽 두세 시에 열차가 그곳을 지난다. 철로가 구불거리는 광경을 잡으려고 연방 셔터를 눌러보지만, 품질이 영 좋지 못하다. 여기서는 기적 소리가 유난히 잦고 브레이크 때문인 듯 열차 쇠바퀴의 마찰 소리가 날카롭다.

고개 정상에 가까워지면서 어둠 속에서도 남중국해가 뚜렷이 보인다. 베트남 사람들은 이 바다를 그냥 동해라고 부른다. 절벽 아래 해안에 하얀 파도가 부서지는 광경이 아름답다. 협곡 정상에 하이반 역이 있다. 약 1분간 안전점검을 한 뒤 2시50분 열차는 다시 출발.

새벽 3시40분. 열차는 유명한 다낭 역에 도착한다. 이곳은 열차 수송의 중심지다. 옛날 베트남 전쟁 때 우리 해병이 상륙했던 곳이라고 안 선배는 설명한다. 15분을 정차한다. 자정 무렵부터 승차객과 하차객 외에는 움직이는 승객이 거의 없다. 4시 조금 전에 다낭 역을 출발한다. 여기부터는 열차의 앞뒤가 바뀐다. 마치 온 길을 되돌아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것은 20년 전에도 똑같았다. 열차는 탐키에서 잠시 정차해 상행 열차를 보낸 뒤 다시 달려 20분을 연착하여 오전 6시30분께 꽝나이 역에 도착한다. 꽝나이 인근에서는 옥수수·토란·땅호박·야자수 등이 특히 눈에 많이 띈다.


사이공 역에 도착한 안병찬(오른쪽)·표완수 기자.ⓒ시사IN 표완수


20년 전과 똑같은 남쪽 풍경

남쪽으로 갈수록 벼가 고개를 숙인 것이 보이더니 꽝나이 남쪽에는 대부분 벼가 익고, 벼베기를 끝낸 논도 많다. 논이나 물가에 수많은 오리 떼가 보이는 것도 20년 전이나 똑같은 풍경이다. 어른 팔뚝보다 굵은 대나무 숲이 많은 것도 옛날과 같다. 6시부터 아침 식사용으로 흰 쌀죽 비슷한 ‘자우가’를 파는 판매원들의 목소리로 열차 안이 다시 소란스러워진다. 승객들도 세수를 하는 등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달걀·오리알·바나나·파파야 등 과일과 과자류 등 온갖 물건이 풍부한 지우찌 역에서 안 선배와 함께 사진 촬영. 안 선배는 모처럼 기관차 촬영에 성공한다. 지우찌를 출발, 열차가 냐짱을 향하자 우리 방 룸메이트인 짱이 짐을 챙기고 아이를 추스른다. 서운한 생각에 그녀의 무거운 짐을 들어다 출구 가까운 곳에 놓아준다.

열차는 40분을 연착해 오후 1시20분 냐짱에 도착한다. 여기서 베트남 라면을 사가지고 점심을 해결한다. 이후에도 열차는 놓친 시간을 만회하지 못하고 탑참·므엉만·비엔호아 역을 모두 40분 정도 연착한 끝에 저녁 8시40분쯤 사이공 역에 도착한다. 오랜 시간 우리의 룸메이트로 마음의 대화를 나누었던 할머니·할아버지 두 분은 비엔호아 역에서 내렸다. 그 두 분과 악수를 나누면서 우리는 이상하게도 무엇인지 서로 통하고 있다는 것을 강하게 느꼈다. 왁자지껄한 사이공 역 앞에서는 ‘베사모’(베트남을 사랑하는 사람들) 회원들이 모임의 중심 인물 ‘안병찬 특파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단역 철마는 '통일급행열차'를 소망하거늘..."로 계속]

 


[베트남 현대사 연표]

1878년 8월  프랑스와 통상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그 영향권 아래 들어간 이후 1884년 프랑스 식민지가 되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편입.

1954년 5월  보응우옌잡 장군이 지휘하는 베트민군이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 섬멸, 프랑스 지배로부터 독립.

1954년 7월  제네바협정에 의해 북위 17°선 이북은 베트남민주공화국이, 이남은 프랑스가 분할 지배.

1964년 8월  미국, 통킹만 사건을 일으켜 베트남에서 군사작전 본격화. 미국은 북베트남 밖 공해상을 순찰하던 자국 구축함이 북베트남 어뢰정 공격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미군 상륙 개시.

1964년 9월 첫 파병을 시작으로 한국은 1973년 3월까지 6차례에 걸쳐 총 병력 32만여 명을 베트남에 파병.

1968년 1월  구정(Lunar Tet) 대공세. 설날 휴전을 제의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이를 깨고 미국에 총공세를 취해 양측 모두 막대한 피해 발생.

1973년 6월  ‘베트남에서의 전쟁 종결과 평화 회복에 관한 협정’(파리평화협정)이 미국과 남베트남, 북베트남과 민족해방전선 4자 간에 체결.  사이공의 티에우 대통령 정부를 지원하던 외국군 철수.

1975년 4월21일 티에우 대통령, 남베트남군의 최후 전투였던 ‘쑤안록 전투’ 패배 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해외 도피. 재야 정치인 즈엉반민 예비역 대장이 대통령 취임.

1975년 4월30일  북베트남 제2군단, 사이공 시내로 진격해 남베트남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가 있는 독립궁 점령. 사이공 함락 직후 민족해방전선 중심으로 남베트남공화국 선포.

1976년 7월  남북총선거 실시 후 새로 구성된 제6기 최고인민회(통일국회)에서 남북 지역 간 통일을 선언함으로써 통일국가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 탄생. 

1979년 6월  제4차 공산당 중앙상임위원회, 1976년부터 추진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패한 사업으로 평가.

1986년 12월 제6차 공산당 전당대회, 경제정책 실패에 따른 당 지도부 개편 요구 및 경제개혁 계속 추진 강조. 개혁실천 방안으로 ‘도이머이’(쇄신) 정책 채택. 경제를 살리고 국민생활 향상 위해 시장경제체제 도입을 통한 근로자 및 농민의 생산성 향상을 유일한 대안으로 설정.

1991년 6월 제7차 당대회, 제5차 5개년 계획(1991~1995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으로 평가하고 도이머이 정책의 지속적 추진 재확인. 개혁정책의 성공으로 경제적 공황상태 극복.

1992년  헌법 개정. 국체를 ‘사회주의법치국가’, 경제체제를 사회주의 지향의 시장경제체제로 규정하여 경제개발 가속화.

1992년 7월  동남아우호협력조약에 가입한 이후 1994년 7월 ARF에 참여. 1995년 7월 아세안(ASEAN)의 7번째 회원국으로 가입.

1992년 12월  한국과 외교관계 수립.

2001년 8월  쩐득르엉 국가주석 방한, ‘한국·베트남 21세기 포괄적동반자관계’ 구축.

2001년 12월  베트남·미국 무역협정 발효. 미국은 2006년부터 베트남에 영구통상무역관계(PNTR) 지위 부여.

2005년 6월  판반카이 총리, 종전 후 정상급 지도자로는 최초로 방미해 양국 정상 간 공동성명 발표. ‘우호적·건설적·다차원적 협력동반자관계’ 구축.

2009년 10월  이명박 대통령, 베트남 국빈 방문해 응우옌밍찌엣 주석과 정상회담. 농득마잉 당서기장, 응우옌떤중 총리와 면담 통해 양국관계를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로 격상키로 합의. 앞서 김대중·노무현 대통령도 베트남 방문.

▒ 1992년 수교 당시 5억 달러이던 양국 간 교역규모는 2008년 100억 달러로 20배 증가.

▒ 한국은 2006년, 2007년 베트남 직접투자 1위국이었으며, 2009년도 투자 누계 205억 달러로 2위(투자 건수는 2327건으로 1위).

 

["장단역 철마는 '통일급행열차'를 소망하거늘..."로 계속]



2010.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