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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벤츠로 사이공 달리는 '배가본드'


 
[내가 만난 사람-'노땅' 이순흥]

 노마(老馬) 몰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배가본드'           

 

"이래뵈도 메르세데스-벤츠는 벤츠야"

 

 

30년 된 메르세데스-벤츠 한 대가 굉음을 내며 호찌민시내를 이리 뛰고 저리 뛴다. 사람들은 이 차가 지나가면 요란한 엔진 소리에 눈을 둥그렇게 뜨고 쳐다본다.

나는 매년 4월말이면 어김없이 호찌민시 탄손녓 국제공항에 내린다. 사이공 패망의 날이자 베트남 통일의 날에 맞춘 연례 여행이다. 짐을 찾아 출구를 나서면 밤 12시가 가까운 시간, 지열이 후끈한 열대의 밤에 어김없이 도착 출구 앞에서 맞아주는 사람이 있다. 유랑민의 삶을 사는 이순흥 회장이다.

그는 골동품 메르세데스-벤츠에 나를 태워 손수 몰고간다. 수동식 변속기어가 끽끽거리고 달리는 소리가 요란하지만 벤츠는 늙은 주인의 늙은 애마처럼 잘 달린다. "이래뵈도 벤츠는 벤츠지, 허허허."

등록증에는 ‘1980년도 생산, 메르세데스-벤츠 230E’로 명기되어있다. 이순흥은 이차를 홍콩 외교관에게 인수해서 햇수로 16년 째 몰고있다.

그는 새 차로 바꿀 생각이 전혀 없다. 한  번은 나한테 이메일로 "이 벤츠차와 함께 생을 마감하겠오.”하고 써보냈다. 나는 면박을 줬다. "이 벤츠차와 함께 또 하루를시작한다.”고 말하라고.

 

쟁반같은 두 얼굴, 코코넛 들고서

  

위 사진은 벤탄시장 한 가운에서 코코넛을 파는 사이공 처녀와 찍은 것이다.


이순흥은 여전히 정력이 넘친다. 욕심도 넘친다. 여전히 현역이다.

무역 알선을 하는 ‘순흥통상’의 대표에다 호찌민한인원로회 11대 회장이고,호찌민시한인회 고문단 협의회장, 호찌민시 한인상공인협의회 명예자문위원이다. 그는 많은 ‘감투’를 확보하려고 신경을 쓴다. 활동의 동력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누가  노욕을 부린다고 흉을 봐도 오불관언이다.

그는 많이 뛰고 많이 먹고 많이 잃어버린다. 그는 식탐가다. 내가 알기로 그는 근년에 지갑을 두 번 잃어버렸다.

 

1975년 6월의 빛바랜 사진

 

1975년 6월16일 한국인 잔류자 일동

 

 ‘사이공 교민 제1세대’인 이순흥 회장.

나는 1975년 4월에 한국일보 기동특파원으로 패망하던 사이공에 도착하여 이순흥 대표를 처음 났다. 나는 그의 자택에 며칠간 묵으면서 일했다. 순흥통상 다낭 지사 직원들을 전화로 연결하여 다낭이 함락되는 최후의 날들을 생생하게 취재했다. 그때부터 우리 둘의 연분은 시작되었다.

1975년 4월30일 새벽 4시10분에 나는 마지막 시누크 헬리콥터를 타고 사이공을 탈출했다.

이순흥 회장은 이대용 공사가 지휘하던 한국 공관원들과 행동을 같이 하다가 사이공을 빠져 나오지 못했다.

 

는 ‘사이공 해방’ 이후에 현지에 떨어진 교민을 대표하여 자치회장이 되었다. 그는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사이공 치화형무소에 투옥당한 '특수 공관원' 이대용 공사, 안희완 영사, 서병호 총경의 옥바라지를 했다. 한국정부의 ‘지령’을 받으며 자신을 희생했는데,뒷날 군사정권이 보상한 것은 훈장 하나뿐이었다.

현재 그의 호찌민시 자택  벽에는 낡은 흑백사진 한 장이 걸려있다. 1975년 6월16일에 판딘풍 가 53번지 김영관 전대사의 관저에서 잔류한 한국 교민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베트남 당국이 대사관원인 이규수 총영사, 김경준 영사, 김교양 통신과장 3명에게 6월27일자로 출국허가를 하자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풍 대령, 이순흥을 증언하다

 

풍 대령과 유명식 대표

 

나는 지난 4월 말 ‘베트남 통일열차 탑승기’의 취재여행 길에 하노이에서 이민국 부국장인 응웬번풍 대령을 찾아서 만났다. 풍 대령의 명함은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공안부 소속 이민국 부국장 응웬번풍 대령’이다.

하노이 교민잡지 <윈도우>의 유명식 대표와 절친하
여 풍 대령(1953년 생)                                            풍 대령의 명함
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통일이 된 직후에 호찌민시에서 근무하면서 이순흥 자치회장을 관리했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그는 1971년 하노이사범대학 2학년 때 군에 입대했다고한다. 풍 대령은 남부 지역에서 항미 전쟁에 참가한 후, 1976년 2월에 호찌민시 근무 발령을 받았다.                   

그는 자기 임무가 호찌민시에 남은 외국인(필리핀인, 한국인, 대만인, 미국인 등)을 “지원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순흥은 당시 한국 교민사회를 위해서 매우 활발하게 일했다. 그는 한국 외교관 과 한국교민, 한국인과 결혼한 베트남 여인 들을 도왔다.”고 그는 말했다.

그런 풍 대령이 지금은 이순흥 회장과 두터운 친분을 쌓고있다. 하노이에서 전화 한 통으로 이순흥 회장의 체류비자를 해결해 준 일도 있다.역사의 흐름이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냈다.

사이공의 교민 1세대 이순흥 회장. 그의 지나온 길은 다음 연표처럼 파란만장하다.

 

[이순흥 유랑인생 연표]

1938년 생

1962년 한국외국어대 영어과 졸업

1962년-1965년 동아통신사 근무

1975년-1981년 베트남 호찌민시 현지한인회 자치회장-베트남 통일 직후 한국정부 인정 하에 민간  영사업무 수행. 잔류교민 철수작업과 억류 공관원 지원 업무

1981년 5월30일 귀국

1981년 6월15일-1981년 12월15일 전국순회강연

1982년 동아건설 아랍에밀레이트연방 아부다비 지사 기획부장

1982년 아프리카 나이제리아 라고스 인근 넷프라이데이 합작회사의 양송이농장/양계장/부화농장 총지배인. 1982년 4월에 나이지리아 쿠데타로 합작회사 운영 포기. 수령 임금으로 항공권을 사서 6월 15개국 일주

1983년 서울에서 무역업 순흥통상 재 설립

1994년 호찌민시 입국. 현지 순흥통상 운영

 

훈장 :

보국훈장 통일장(1급)-전두환 대통령

국가유공자-국가보훈처

자랑스러운 외대인상-한국외국어대학교 총장

국가유공자증서-김영삼 대통령


2010.06.09
                                                          posted by 안병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