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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찬 르포르타주 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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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향 : 역사와 문학의 저널리즘 탐험
by 안병찬

알립니다

내용에서 보듯이 ‘공적서’라는 제목이

붙은 이 자료는 제3자가 어떤 계기에

안병찬 본인을 추천하는 글로서 작성

한 것입니다.

사실의 근거인 각주 및 증빙서류는 안

병찬 본인이 제공한 것임을 알립니다.


공 적 서

‘르포르타주’ 저널리즘의 역할 모델

 

 

언론인 안병찬은 두 줄기 저널리즘을 일관하여 실천해왔으며, 현재도 언론의 자유와 책임의 균형을 위해 일로 매진하고 있는 최고(最古)의 현역 기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가 추구한 저널리즘의 한 줄기는 현장에 바탕을 둔 저널리즘의 전문적인 실천이며, 또 한 줄기는 정치언론학 박사로서 언론현장을 이론에 묶는 경험주의적 저널리즘 이론의 추구입니다. 뜨거움과 차가움이 만나는 모순과 통합의 길이라고 말하는 보도 리얼리즘의 길에서 언론인 안병찬의 활동력이 이룩한 성과는 방대합니다. 그 때문에 그의 저널리즘 경력에는 자주 독보적(獨步的)이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1962년 한국일보 13기 수습기자로 언론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철저한 행동력의 경찰기자로서 종횡무진 사건을 좇으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취재력을 단련했습니다. 1975년 베트남 통일 전쟁 결정시기에 유일한 한국 특파원으로서 패망하는 월남 수도 사이공에 최후 순간까지 남아 생사의 고비를 넘기며 ‘역사현장’을 보도한 예에서도 그의 용기와 자질을 볼 수 있습니다.[각주:1]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쳐 2008년 현재까지 46년 간 그는 저널리즘의 전문 직업성을 추구하는 한편 언론학 전공자가 되어 언론현장과 관련한 저널리즘 이론을 천착하여 적지 않은 실적과 공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2008년 1월에는 언론인권센터 제3대 이사장에 선임되어 언론보도의 피해자를 법률적 사회적으로 구조하고, 정보공개 청구운동으로 환경을 감시하여 언론의 책임을 촉구하는 사업을 펼치고 있습니다.

60대 후반의 나이에 이른 2005년부터 2년간은 현장 취재와 인터뷰 작업을 진행한 후 기획 특집 기사를 집필하여 일간신문에 연재하여 여전히 활기차게 행동하는 시니어 저널리스트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각주:2]일관되게 보도 저널리즘과 이론의 길을 걸어가는 그를 ‘최고(最古)의 현장기자 안병찬’으로 부르는 것은 아주 적확한 지적이라 생각합니다.

중요한 공적 항목은

(1) 경찰 기자로서 발휘한 전설적’ 추구력과 후진 양성
(2) 1975년 역사현장인 ‘남부 베트남의 최후’보도
(3) 국제문제 기자로서 통일 후 베트남을 추적 보도하고 중국 전문 저널리스트로서 중국문제를 지속적으로 보도함
(4) 시사주간지‘시사저널’의 창간 실험-새로운 형식과 내용의 개발과 실험으로 시사주간 저널리즘의 한 획을 그음
(5) 언론학 박사로서 언론 현장과 저널리즘 이론의 관계 연구
(6) 오늘도 진행 중인‘일선기자’활동-일간신문 칼럼니스트 및 ‘르포르타주 저널리스트’로서 현장 보도 및 저술 출간 계속



 

  1. 1975년 6월 안병찬은 르포르타주『사이공 최후의 새벽』을 발간. [본문으로]
  2. [본문으로]
  3. 안병찬의 르포르타주 역사서『사이공 최후표정 칼러로 찍어라』(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 2005년 4월)의 서문, ‘무덤은 기자의 고향이다’ 참조. [본문으로]
  4. 안병찬 저『신문기자가 되려면』의 취재노트(1986년) 및『신문 방송기자가 되는 길』(1993년)의 기자수첩에 기술함. [본문으로]
  5. 『신문 방송기자가 되는 길』의 기자수첩 및 관훈저널 2006년 여름호 ‘나의 특종기’에 기술함. [본문으로]
  6. 『사이공 최후의 새벽 특파원의 최신보고-베트남, 오늘의 베트남』(1989년 한국일보사 발행) [본문으로]
  7. 한국일보 1973년 1월25일자 ‘베트남의 전쟁애가-작곡가 찐 꽁 선’, 관훈저널 2002년 여름호 ‘찐 꽁 선 추적 27년’,『사이공 최후 표정 칼러로 찍어라』의 ‘사이공 이후 시대 30년 : 1975-2005년,’ 시사저널 제559호 2000년 7월13일자 ‘베트남 분단과 통일의 산 증인-찐 꽁 선을 찾아서’, 관훈저널 2002년 겨울호, 취재비화 ‘작곡가 찐 꽁 선 추적 27년’등. [본문으로]
  8. 한국일보 1973년 1월25일자 ‘베트남의 전쟁애가-작곡가 찐 꽁 선’, 관훈저널 2002년 여름호 ‘찐 꽁 선 추적 27년’,『사이공 최후 표정 칼러로 찍어라』의 ‘사이공 이후 시대 30년 : 1975-2005년,’ 시사저널 제559호 2000년 7월13일자 ‘베트남 분단과 통일의 산 증인-찐 꽁 선을 찾아서’, 관훈저널 2002년 겨울호, 취재비화 ‘작곡가 찐 꽁 선 추적 27년’등. [본문으로]
  9. 시사저널 제63호 커버스토리 ‘한국기자 첫 탑승기, 사이공-하노이 통일열차 2박3 일,’ 1991년 1월10일자. [본문으로]
  10. 시사저널 제163호 ‘남지나해상의 의문 17년 만에 풀었다’(1993년 1월14일) 외 기사, 시론, 칼럼 다수. [본문으로]
  11. 한국일보 1978년1월-2월. [본문으로]
  12. 안병찬 저『중공 중공인 중공사회』(서울:다락원, 1978년) [본문으로]
  13. 한양대학교 발행 ‘중국문제’ Ⅲ-2호(1978년 9월)에 게재됨. [본문으로]
  14. 중국 상하이 후탄대학, 1996년 개최. [본문으로]
  15. 이는 정보수집과정에 주로 의존하던 일반적 관행을 뛰어넘어 삼각 논의를 통해 정보수집 및 처리과정을 시각적으로 정치하게 설치하는 새로운 방식이다. 하나하나의 기사 항목과 하나하나의 지면은 취재-미술-사진 세 부서의 담당자가 한자리에 모여 치열한 교차논의를 거쳐서 확정한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다양성의 조화미를 시각 뉴스 보도의 바탕으로 삼는 방식임. [본문으로]
  16. 정달영 전 한국일보 주필은 ‘한국 뉴스주간지의 한 획을 그었다’고 평함. [본문으로]
  17. 『신문 발행인의 권력과 리더십-장기영의 부챗살 소통망 연구』, 나남출판 1999년 4월. [본문으로]
  18. 논문‘각고면려(刻苦勉勵)의 기자 작업관과 대학생들의 반응에 관한 Q연구, ’언론학보 제42-4호 1998년 여름호, PP.30-56, 한국언론학회. [본문으로]
  19. 1.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커뮤니케이션 연구소 제11회 언론취재보도 관행의 개선을 위한 워크샵 주제발표 논문(1996년). 2. 한국언론학회 주최 언론윤리 강령 국제심포지움 ‘한국언론의 자율 규제, 어떻게 할 것인가?’ 주제 발표논문(1996년). 3. 한국언론연구원 총서 20(1996년). 4. 한국언론학보, 제42-4호, 1998년 여름호. 5. 한국기자협회 제22회 기자포럼 발제, 2003년2월13일. [본문으로]
  20. 방송위원회 법인설립허가, 2001년 1월15일자. [본문으로]
  21. 초대 이사진은 표재순(연세대 영상대학원), 이정수(한양대 신방과), 김희진(연세대 신방과), 차인태(수원대 신방과), 최충웅(경희대 신방과) 등 언론학 전공 교수로 구성.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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