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안병찬 인물 창고

공적서

알립니다

내용에서 보듯이 ‘공적서’라는 제목이

붙은 이 자료는 제3자가 어떤 계기에

안병찬 본인을 추천하는 글로서 작성

한 것입니다.

사실의 근거인 각주 및 증빙서류는 안

병찬 본인이 제공한 것임을 알립니다.


공 적 서

‘르포르타주’ 저널리즘의 역할 모델

 

 

언론인 안병찬은 두 줄기 저널리즘을 일관하여 실천해왔으며, 현재도 언론의 자유와 책임의 균형을 위해 일로 매진하고 있는 최고(最古)의 현역 기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가 추구한 저널리즘의 한 줄기는 현장에 바탕을 둔 저널리즘의 전문적인 실천이며, 또 한 줄기는 정치언론학 박사로서 언론현장을 이론에 묶는 경험주의적 저널리즘 이론의 추구입니다. 뜨거움과 차가움이 만나는 모순과 통합의 길이라고 말하는 보도 리얼리즘의 길에서 언론인 안병찬의 활동력이 이룩한 성과는 방대합니다. 그 때문에 그의 저널리즘 경력에는 자주 독보적(獨步的)이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1962년 한국일보 13기 수습기자로 언론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철저한 행동력의 경찰기자로서 종횡무진 사건을 좇으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취재력을 단련했습니다. 1975년 베트남 통일 전쟁 결정시기에 유일한 한국 특파원으로서 패망하는 월남 수도 사이공에 최후 순간까지 남아 생사의 고비를 넘기며 ‘역사현장’을 보도한 예에서도 그의 용기와 자질을 볼 수 있습니다.[각주:1]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쳐 2008년 현재까지 46년 간 그는 저널리즘의 전문 직업성을 추구하는 한편 언론학 전공자가 되어 언론현장과 관련한 저널리즘 이론을 천착하여 적지 않은 실적과 공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2008년 1월에는 언론인권센터 제3대 이사장에 선임되어 언론보도의 피해자를 법률적 사회적으로 구조하고, 정보공개 청구운동으로 환경을 감시하여 언론의 책임을 촉구하는 사업을 펼치고 있습니다.

60대 후반의 나이에 이른 2005년부터 2년간은 현장 취재와 인터뷰 작업을 진행한 후 기획 특집 기사를 집필하여 일간신문에 연재하여 여전히 활기차게 행동하는 시니어 저널리스트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각주:2]

“현장은 기자의 고향이며 때로는 무덤이다. 기자는 현장 안에 있되, 그 현장에 속하지 않는다. 취재보도의 매순간마다 개입과 소외의 고통스런 통합은 동시에 그리고 지속적으로 유지되면서 보도의 리얼리즘은 이루어진다. 기자는 존재판단의 바탕 위에서만 가치판단을 세워나가는 자이고, ‘이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부터 저 자신의 자아가 철저히 소외되는 외로움을 감내하는 자인 것이다. 그것이 험난하고, 때로는 불가능해 보이기도 하는 보도 리얼리즘의 길이다.

안병찬 기자는 그 험난한 리얼리즘의 바닥에 몸을 갈아야 하지만, 거기로부터 또다시 자신을 빼내야하는 그 가혹한 현장에, 늘 나가있는 것이다.

그 험난한 여정을 거친 기자의 현장기록은 때로는 역사 보고서의 가치를 갖는다. 나는 보도 리얼리즘의 모순과 통합의 길을 거쳐 나온 안병찬기자의 ‘현장기록의 힘’이 역사와 함께 살아있을 것으로 믿는다.”

영역별 공적 내용

안병찬의 경력 및 공적을 영역별로 기술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1960년대 경찰기자의 추구력과 후진 양성

1960년대의 안병찬은 사건기자로 잔뼈가 굵어졌다는 말을 들으며 현장에 강한 행동성과 사실 앞에 다부진 추구력을 발휘함. ‘살인사건 현장에 나가 피살자의 상처 깊이를 자로 재보았다’는 전설의 주인공임.

1962년 경찰출입 초년생이던 그는 서울 용산경찰서 관내에서 일어난 일가족 살인사건을 취재하면서 경찰수사본부를 앞질러 가해자인 가장이 익명으로 자살했다는 사실을 밝혀내어 사건을 종결시킨 좀처럼 보기 드문 특종을 함.[각주:3]

서울특별시경찰국 출입기자 시기인 1969년에는 한강나루터 여인피살사건을 취재하면서 시경 강력계 수사본부에 ‘치열흔(투즈 마트)’수사를 제의, 경찰이 이를 수용하여 한국 최초로 치열흔 과학수사의 개가를 올리는데 숨은 역할을 함.[각주:4]

1960년대 중 후반기에 안병찬은 중앙일보와 한국일보의 시경출입기자(이른바 시경캡)를 역임하면서 많은 후배 기자들의 사건현장 취재를 이끌고 지도함.

2. 1975년 4월 30일 ‘남부 베트남 붕괴’의 역사 현장 보도

생사를 건 ‘사이공 최후의 새벽’

안병찬은 1975년 3월 23일 한국일보 기동특파원으로 사이공에 급파되어 한국기자로는 유일하게 남부 베트남이 붕괴해 가는 전 과정을 34일 간 단독 보도하고 4월 30일 새벽 4시 10분, 사이공 패망을 몇 시간 앞두고 미국대사관 구내로 날아온 마지막 미 해군 탈출헬리콥터에 탑승하여 생환한 후 필리핀 수빅만과 괌도를 거쳐 귀국함.

사이공의 패망 상황을 현장 보도하고『사이공 최후의 새벽』을 저작한 공로로 1975년도 서울특별시 문화상 언론부문을 역대 최연소자로 수상함.

베트남 전선(前線)기자

안병찬은 1975년 사이공의 최후를 보도하기 전, 한국군 월남 파병 기간 중인 1971년부터 1973년까지(20개월) 주월특파원으로 사이공에 주재할 때 세 가지 중요한 사안을 단독보도 한 바 있음.

첫째, 1972년 4월 파리휴전협정 조인을 예상한 북베트남의 춘계대공세 때 17도 휴전선에 있는 최전선 격전지 동하읍(쾅찌성)까지 접근하여 공산군의 휴대용 로켓 B-40의 저격을 받아 생명의 위험을 넘기면서 북군의 대공세를 취재 보도함.

둘째, 같은 달 북베트남군이 맹호사단을 상대로 일으킨 안케 전투의 개전을 단독보도, 차후에 공산군 거점이던 638고지에 올라가 현장 취재함.

셋째, 1973년 3월 파리평화협정의 조인에 따른 주월한국군사령부의 최종철수 상황을 한국특파원으로 유일하게 남아서 보도함.

3. 베트남, 중국 전문가로 전신

14년 만에 쓴『베트남, 오늘의 베트남』

1989년 4월 말에 맞추어 한국일보 논설위원으로 14년 만에 호치민시(사이공)를 다시 방문한 그는‘전쟁지대에서 무역지대로 바뀐 인도차이나’의 상황 아래 쇄신정책(도이머이)을 발동한 베트남 경제 상황을 22일 간 취재하여 ‘사이공 최후취재 안병찬 특파원-공산화 14년 다시 가본 베트남’을 9회 연재함.

이를 바탕으로『사이공 최후의 새벽』의 후속 보고라고 할베트남, 오늘의 베트남을 출간.[각주:5] 동 저서는 통일 베트남 진출을 시도하는 한국 기업인들의 상담 및 계약현장 취재기, 현지 소매 물가조사 목록, 베트남 외국투자법 및 외국기술이전조례 등 관계법을 수록하여 많은 상사와 기업인의 길잡이 역할을 함.

민요작곡가 찐 꽁 선 추적 27년 [각주:6]

1989년 호치민시를 재 방문했을 때 당대의 반전 민요작곡가 찐 꽁 선을 수소문하여 재회에 성공한 이래 2001년 그가 사망하기 전까지 매년 인터뷰를 통해 분단과 통일시대를 살아가는 베트남 지식인의 변모를 추적 보도함.[각주:7]

베트남 통일열차 최초 탑승기 보도

시사 주간지 제작책임을 맡고 있던 안병찬은 1990년 12월 국제부장을 베트남에 특파하여 호치민-하노이 간 1700km를 2박3일간 종단하는 통일열차를 취재토록 하여 커버스토리로 보도함. 이 탑승기는 한국언론에서 최초였음.[각주:8]

현재도 진행 중인 호찌민시 방문 보도

매년 1, 2회 호찌민 시를 탐방하여 기사 및 칼럼 등을 통해 변모하는 현지 상황을 보도하고 있음.[각주:9]

증보 개작판 『사이공 최후 표정 컬러로 찍어라』출간

베트남 통일(사이공 패망) 30주년에 맞추어 2005년 4월 말에『사이공 최후의 새벽』과 그 이후에 추적 취재한 자료와 역사적 전개를 증보 개작하여『사이공 최후표정 컬러로 찍어라』를 출간함.

안병찬은 ‘사이공 최후의 새벽’은 한 시대의 종말이 아니고 새로운 시대로 이행하는 출발선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사이공 체제가 붕괴한 이후의 경과를 그의 시각으로 짚어보고 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품어왔다. 그는 30년 전에 쓴 르포르타주『사이공 최후의 새벽』증보판을 베트남 통일 30주년이 되는 날에 맞추어 내는 까닭은 바로‘사이공 최후의 새벽’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인식에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베트남의 통일 특급열차 탑승이나 당대의 민요작곡가 찐 꽁 선 추적, 과거에 대한 전후세대의 평가, 저간의 이라크 파병과 남북교류 문제 등은 모두 사이공의 최후와 조응(照應)하고 교접하는 사안으로 보았다. 이런 시대 상황에 대해 안병찬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는 이런 관계들을 통해서 시대의 순환을 깨닫는다. 역사는 끊임없이 해석해내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과거란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경험들을 집적한 자료 위에 오늘의 이념과 관심을 투영하는 것이라는 주장에 동의한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실과 인식주체의 능동성 양쪽을 인정한다면, 베트남 통일 30주년은 같은 해에 우리가 맞이한 광복 60주년과 서로 비추어 대응하는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홍콩대학 유학: 시널러지스트로의 전신 도모

사이공에서 생사의 고비를 넘긴 안병찬은 다음 뉴스 초점은 중국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홍콩을 유학 목적지로 선택함. 홍콩대학 및 홍콩중문대학에서 1년 3개월 간 ‘보통화(표준 중국어)’를 집중적으로 학습하고 각종 중국문제 강의를 수강. 런민르바오(人民日報), 따궁바오(大公報) 등 수많은 중국 대륙 저널을 구독하며 ‘중국문제전문가(sinologist)'로 새롭게 전신함. 한국일보 1면에 기획기사 ‘대륙만화경’ 16회 연재.[각주:10]

『중공 · 중공인 · 중공사회』 발간[각주:11]

‘대륙 만화경’의 연재를 마친 후『중공 · 중공인 · 중공사회』를 발간함.(명저『모택동 사상』의 저자인 김상협 전고려대학교 총장은 이 책을 일별한 후 중국대륙 내면의 변화를 생동감 나게 기술했다는 평을 줌).

‘중국 문자개혁’ 논문 발표

한양대학교 중국문제연구소 주최 제14차 정기연구회에서 중국문자개혁 주제논문 발표. 제목‘표음 한자에의 길-중국의 간화, 병음화, 보통화 운동을 통해 본 변혁의 과도상’[각주:12]
관훈클럽 및 언론학회 주최 제8회 최병우기자 기념 심포지엄에서 주제논문 ‘한중관계와 언론의 역할’발표.[각주:13]

중국 보도 현재 진행형

‘한국일보 필진 세계를 가다’등 연재물과 특집기사를 통해 중국대륙의 변화를 밀착하여 보도함.
현재까지 중국 여행 및 런민르바오 인터넷 망(런민왕)을 통해 중국문제를 취재하여 칼럼을 통해 지속적으로 보도하고 있음.

4. 시사 주간지 시기-새로운 형식과 내용 실험

1989년 중견 언론인 친목단체 관훈클럽의 총무 직을 마친 직후 새로 창간한 시사주간지(시사저널) 제작 책임자로 자리를 옮겨 의욕적이고 모험적인 실험을 거듭함. 영입한 영국과 미국의 미술책임자(아트 디렉터)와 함께 미술적 요소를 제작의 중심에 두는 포맷을 구성하는 한편 시사저널 고유의 ‘지면 구축 삼각회의’ 즉 ‘세이핑 미팅(shaping meeting)’과 브레인스토밍 등 새로운 편집국 제작 체제를 확립함.[각주:14],[각주:15] 이러한 편집국 시스템의 혁신과 함께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올해의 인물’ ‘평균 한국인’등 차별화한 기획물을 운영. 그 결과 창간호 때 정기구독자가 만 명을 넘었고 1990년 10월16일에 정기구독망은 10만4181 계좌에 이르러 잡지 사상 유례가 없는 기록을 세우며 단기에 국내 최고의 시사주간지 자리를 확립했다. 정기구독망은 1990년에서 1995년 사이에 최고 14만 3천에 이르러 시사저널 절정기를 맞음.

△ 중요한 기획물과 커버스토리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평균 한국인’ ‘올해의 인물’등 특집을 기획.

‘우주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청백리 방콕시장 잠롱’ ‘민족의 노래 아리랑’ ‘친일 매국노 후손의 재산 찾기’ ‘베트남 통일열차 최초 탑승기’ 등.

5. 언론 현장과 저널리즘 이론의 관계 연구·언론활동

게이트키퍼 저널리즘의 이론화

△ 편집국 조직 내 참여관찰 연구

서울대학교 신문대학원 문학석사 학위논문은 ‘외신의 게이트키핑 과정에 작용하는 요인 분석-한국일보사 편집국을 중심으로 한 사례 연구’(1975년). 이 논문은 게이트키핑 연구에 관한 문헌조사를 충실하게 한 후 편집국 조직 내의 동태적인 정보 흐름과 뉴스 취사선택 과정을 참여관찰법 및 경험주의적 방법론으로 고찰. 저널리즘의 이론화를 시도한 초기 게이트키핑 연구 논문으로 평가받고 인용됨.

△ 신문 발행인의 조직 내 결정행위 연구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치언론학박사 학위논문은‘신문 발행인의 게이트키핑 특성에 관한 연구-한국일보 창간인 장기영의 사례를 중심으로’(1999년)임. 이 논문 역시 게이트키핑 이론에 입각하여 신문 발행인의 의사결정 행위를 고찰함. 텍스트를 구조주의적, 해석학적 방법론으로 분석하여 게이트키퍼 저널리즘의 이론화를 시도함. 동 논문은 단행본으로 출간됨.[각주:16]

△ 언론학과 대학생과 수습기자의 기자 직업관 연구

2000년대 진입을 앞둔 시기에 ‘신세대는 하드워킹(hardworking)의 기자 작업관을 어떻게 인식할까, Q방법론적 연구 분석’을 통해 주관성을 찾아본 논문을 발표함. 주관성 구조의 유형(typology)을 분류하는 Q연구는 언론학 강의를 수강하는 신세대 대학생과 수습기자가 가지는 느낌과 태도를 찾아 세분화하는 데 적합한 방법론임.[각주:17]

현장 언론학 교재 3권 출간

1996년 언론학 교수로 전신한 안병찬은 현장을 이론에 접목하려는 원망(願望)을 품고 중단 없이 열정을 뿜어댐. 그는 저널리즘의 리얼리즘이라는 하나의 주의(主義)와 방법을 원칙으로 견지하면서 이론의 현장 실천가이자 현실 행동가가 되고자 노력함. 근래에 저널리즘 연구자들은 언론도 실제 상황을 다룰 때 사회과학과 유사하게 기술하고 해석하고 예측하는 과학주의적 방법으로 접근한다고 지적. 사회현상을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기록하는 기술의 단계에서 시작하여, 기술된 사회현상을 기호의 법칙에 따라 설명하고, 그것에 해석을 가하여 미리 대책을 강구할 수 있게 예측을 한다는 생각임. 이런 저널리즘 과정의 체험을 녹여내어 이론과 접목한 교재를 출간함.

‘저널리즘 강의’(1999년)

‘뉴스 저널리즘 실무특강’(2001년)

‘미디어와 사회’(2002년) 등 3권을 출간.

저널리즘 관련 논문 다수 발표 [각주:18]

1. ‘취재체계의 문제점 진단’

2. ‘3 TV의 동시간대 선거예측방송 오보 정도 비교분석

-4. 11 총선 예측 보도 사례연구’

3. ‘신문 방송기사문장, 기획․심층ㆍ고발ㆍ르포-신문’

4. ‘각고면려의 기자 작업관과 대학생들의 반응에 관한 Q연구’

5. ‘출입기자단 체계의 개혁 방안’

방송 활동

-문화방송 객원해설위원으로 ‘안병찬의 일요광장’의 사회를 진행하여 무게 있고 성실한 시사토론 프로라는 평가를 받음.(1996년 10월 -1998년 4월)

-방송위원회 보도교양 제1심의위원회 위원장으로 3년 2개월 간 활동하여 문화방송의 편파보도 시비 등 각종 사안을 균형 있게 판단하기위해 진력함.(2000년 3월-2003년 5월)

-한국방송 사상 최초로 토론의 전 과정을 녹화 방송한‘대통령 후보 초청 관훈 토론회’의 패널리스트(1987년)로, ‘한국일보 및 서울방송 주최 대통령 후보 초청 토론회 ’패널리스트(1998년)로, 그 외에 다수의 시사 방송토론회에 토론자 및 대담자로 참가함.

다매체 시대에 대응 ‘사단법인 한국VJ협회’ 설립

2000년 11월에 방송위원회 인가단체인 ‘사단법인 한국비디오저널리스트 협회’를 설립하여 초대 회장에 취임.[각주:19] 서울특별시와 지자체, 여러 대학과 연대하여 꾸준하게 비디오저널리즘 확산을 위한 세미나와 발표회 활동을 계속하고 있음.

동 협회는 다매체 다체널 영상시대에 가장 적합한 저널리즘의 하나가 비디오저널리즘이라는 인식 하에 국내에서 최초로 구성한 비영리 법인임.[각주:20]

기타 해외 특파 활동 

6. 르포르타주 저널리스트 선언

일간 내일신문 칼럼니스트로 현장 취재를 멈추지 않고 있는 안병찬은 2005년 4월『사이공 최후 표정 칼러로 찍어라』를 출간하면서 ‘르포르타주 저널리스트’라는 새로운 직업명을 걸고 현장 저널리즘의 최고 가치를 향해 출발을 다짐.

르포르타주가 저널리즘 작업의 정수(精髓)라고 여겨온 안병찬은 웅대한 구도로 전개되는 르포르타주가 궁극적으로 문학적 저널리즘, 역사서로서의 저널리즘을 지양함. 그는 르포르타주가 갖는 힘은 냉철한 숫자, 깨끗한 서정, 체험에서 울어나는 명징(明徵)이 글에 용해되기 때문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7. 언론의 자유와 책임의 균형을 위한 최신의 작업

그는 2008년 언론인권센터(사단법인) 제7차 정기총회에서 제3대 이사장에 선출되어 ‘정확한 보도 · 공정한 언론 ·  정직한 언론의 실현’이라는 언론인권센터의 사업목표를 향해 일하고 있음. 저널리즘의 ‘문지기’에서 저널리즘의 ‘감시자’로 역할을 확대한 그는 다음과 같은 슬로건을 내 세웠다.

“언론의 자유와 책임이 균형을 잡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테제입니다.”

맺음말

안병찬 그는 부지런함, 판단력, 끈질김, 탐구심, 현장확인성의 기질을 갖추고, 미래를 내다보며 부단히 전신을 하면서 시종일관 언론 본연의 영역에서 오늘도 일로 매진하는 올곧은 언론인으로 후배들에게는 하나의 사표입니다. 한 가지 단어로 그의 특징을 말한다면 ‘르포르타주 저널리즘의 역할 모델’이라고 할 것입니다.

_M#]

 

  1. 1975년 6월 안병찬은 르포르타주『사이공 최후의 새벽』을 발간. [본문으로]
  2. [/footnote]일관되게 보도 저널리즘과 이론의 길을 걸어가는 그를 ‘최고(最古)의 현장기자 안병찬’으로 부르는 것은 아주 적확한 지적이라 생각합니다.

    중요한 공적 항목은

    (1) 경찰 기자로서 발휘한 전설적’ 추구력과 후진 양성
    (2) 1975년 역사현장인 ‘남부 베트남의 최후’보도
    (3) 국제문제 기자로서 통일 후 베트남을 추적 보도하고 중국 전문 저널리스트로서 중국문제를 지속적으로 보도함
    (4) 시사주간지‘시사저널’의 창간 실험-새로운 형식과 내용의 개발과 실험으로 시사주간 저널리즘의 한 획을 그음
    (5) 언론학 박사로서 언론 현장과 저널리즘 이론의 관계 연구
    (6) 오늘도 진행 중인‘일선기자’활동-일간신문 칼럼니스트 및 ‘르포르타주 저널리스트’로서 현장 보도 및 저술 출간 계속



    [#M_더보기|접기|
    결국, 안병찬이 지양하는 저널리즘의 본질은 현장과 사실에 바탕을 둔 디테일을 발판으로 삼되 거기 머무르지 않고, 현장의 지평을 뛰어 넘어서 저널리즘에 역사 현장의 치열한 체험을 용해시켜 ‘르포르타주 역사서’ 또는 ‘르포르타주 문학서’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안병찬이 최근에 발간한『사이공 표정 컬러로 찍어라』에 ‘한국 르포르타주의 정수’라는 글귀가 붙은 것은 혁명 현장을 르포르타주 문학으로 용해시킨 프랑스 작가 앙드레 말로를,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 및 중국 대장정의 르포르타주로 역사서를 만들어 낸 미국 언론인 존 리드와 에드가 스노를, 한국인 공산주의 독립운동가 김산의 개인사 속에 응축된 역사서 ‘아리랑의 노래’를 쓴 미국 여성기자 님 웨일즈를, 그가 지표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널리즘의 길을 걸은 작가 김훈은 안병찬이 지양하는 보도 리얼리즘과 르포르타주 저널리즘의 일면을 다음과 같은 요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footnote]안병찬의 르포르타주 역사서『사이공 최후표정 칼러로 찍어라』(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 2005년 4월)의 서문, ‘무덤은 기자의 고향이다’ 참조. [본문으로]

  3. 안병찬 저『신문기자가 되려면』의 취재노트(1986년) 및『신문 방송기자가 되는 길』(1993년)의 기자수첩에 기술함. [본문으로]
  4. 『신문 방송기자가 되는 길』의 기자수첩 및 관훈저널 2006년 여름호 ‘나의 특종기’에 기술함. [본문으로]
  5. 『사이공 최후의 새벽 특파원의 최신보고-베트남, 오늘의 베트남』(1989년 한국일보사 발행) [본문으로]
  6. 한국일보 1973년 1월25일자 ‘베트남의 전쟁애가-작곡가 찐 꽁 선’, 관훈저널 2002년 여름호 ‘찐 꽁 선 추적 27년’,『사이공 최후 표정 칼러로 찍어라』의 ‘사이공 이후 시대 30년 : 1975-2005년,’ 시사저널 제559호 2000년 7월13일자 ‘베트남 분단과 통일의 산 증인-찐 꽁 선을 찾아서’, 관훈저널 2002년 겨울호, 취재비화 ‘작곡가 찐 꽁 선 추적 27년’등. [본문으로]
  7. 한국일보 1973년 1월25일자 ‘베트남의 전쟁애가-작곡가 찐 꽁 선’, 관훈저널 2002년 여름호 ‘찐 꽁 선 추적 27년’,『사이공 최후 표정 칼러로 찍어라』의 ‘사이공 이후 시대 30년 : 1975-2005년,’ 시사저널 제559호 2000년 7월13일자 ‘베트남 분단과 통일의 산 증인-찐 꽁 선을 찾아서’, 관훈저널 2002년 겨울호, 취재비화 ‘작곡가 찐 꽁 선 추적 27년’등. [본문으로]
  8. 시사저널 제63호 커버스토리 ‘한국기자 첫 탑승기, 사이공-하노이 통일열차 2박3 일,’ 1991년 1월10일자. [본문으로]
  9. 시사저널 제163호 ‘남지나해상의 의문 17년 만에 풀었다’(1993년 1월14일) 외 기사, 시론, 칼럼 다수. [본문으로]
  10. 한국일보 1978년1월-2월. [본문으로]
  11. 안병찬 저『중공 중공인 중공사회』(서울:다락원, 1978년) [본문으로]
  12. 한양대학교 발행 ‘중국문제’ Ⅲ-2호(1978년 9월)에 게재됨. [본문으로]
  13. 중국 상하이 후탄대학, 1996년 개최. [본문으로]
  14. 이는 정보수집과정에 주로 의존하던 일반적 관행을 뛰어넘어 삼각 논의를 통해 정보수집 및 처리과정을 시각적으로 정치하게 설치하는 새로운 방식이다. 하나하나의 기사 항목과 하나하나의 지면은 취재-미술-사진 세 부서의 담당자가 한자리에 모여 치열한 교차논의를 거쳐서 확정한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다양성의 조화미를 시각 뉴스 보도의 바탕으로 삼는 방식임. [본문으로]
  15. 정달영 전 한국일보 주필은 ‘한국 뉴스주간지의 한 획을 그었다’고 평함. [본문으로]
  16. 『신문 발행인의 권력과 리더십-장기영의 부챗살 소통망 연구』, 나남출판 1999년 4월. [본문으로]
  17. 논문‘각고면려(刻苦勉勵)의 기자 작업관과 대학생들의 반응에 관한 Q연구, ’언론학보 제42-4호 1998년 여름호, PP.30-56, 한국언론학회. [본문으로]
  18. 1.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커뮤니케이션 연구소 제11회 언론취재보도 관행의 개선을 위한 워크샵 주제발표 논문(1996년). 2. 한국언론학회 주최 언론윤리 강령 국제심포지움 ‘한국언론의 자율 규제, 어떻게 할 것인가?’ 주제 발표논문(1996년). 3. 한국언론연구원 총서 20(1996년). 4. 한국언론학보, 제42-4호, 1998년 여름호. 5. 한국기자협회 제22회 기자포럼 발제, 2003년2월13일. [본문으로]
  19. 방송위원회 법인설립허가, 2001년 1월15일자. [본문으로]
  20. 초대 이사진은 표재순(연세대 영상대학원), 이정수(한양대 신방과), 김희진(연세대 신방과), 차인태(수원대 신방과), 최충웅(경희대 신방과) 등 언론학 전공 교수로 구성. [본문으로]

'안병찬 인물 창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우영 만평-파리 특파원의 신경질  (0) 2017.04.27
이력서  (0) 2009.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