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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찬 르포르타주 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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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향 : 역사와 문학의 저널리즘 탐험
by 안병찬

[한국일보-제2신]

 

항복전야…

 

태극기 내려지는 대사관 앞

 

연신 카메라 셔터만

 

 

[마지막 종군 기자 안병찬이 본 사이공 최후의 새벽,

 

그후 40년] 4월 29일

 

수정: 2015.04.30 08:20

등록: 2015.04.29 18:24

 

 

 

  "2시간 내 긴급 철수" 美 전화 후 본국 통신시설까지

 

 

  도끼로 내려쳐

 

 

 

  "통일 베트남에 다시 들어가 달라" 주불특파원 부임

 

 

  중 밀서 받고

 

 

 

  입국 기회 노렸지만 결국 무산

 

 

  항미 전쟁 시기 베트남 외교장관 전설의 '마담 빈'

 

 

  2008년 인터뷰도

 

 

 

     

   사진=975년 4월 29일 사이공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철수에 앞서

        

    김영관 대사와 대사관 직원들이 마지막으로 태극기를 하강시키

 

    있다. 이 장면을 찍고 있는 사람이 안병찬 특파원이다. [안병찬 제공]

 

 

항복전야 남중국해

 

4월 29일 사이공은 항복전야였다. 나는 24시간 통행금지가 발령돼 인적이 없는 빈 거리를 달려 사이공 중앙우체국 기계실로 뛰어들었다.

텔렉스 호출번호:케이2244 한국일보 서울(K2244 HKILBO SEOUL)…….

오전 9시 30분, 한국일보 본사가 열리고 테이프가 돌아가면서 기사문이 토닥토닥 운율을 타고 들어가기 시작한다. 나는 타자 판을 응시했다.

“사이공 최악의 날 4월 28일…….”

32분 송고가 끝나는 순간 조순환 외신부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우리는 짧게 위기상황에 대한 서로의 정보를 교환하고 통신을 마쳤다.

 

이 시간 남중국 해역에는 미국 해군 7함대가 출동해 400리에 걸쳐 진용을 전개해 놓고 있었다. 후방에 떠 있는 기함 오클라호마호에서 7함대 사령관 조지 피보디 스틸 제독(해군중장)은 베트남에서 미국인을 구출할 워싱턴의 작전 명령을 기다렸다. 44척으로 구성된 기동함대는 사이공에서 약 50㎞ 떨어진 해역으로 진출하여 대기했다.

항공모함 핸코크호, 미드웨이호, 오키나와호 등에서는 불과 2주일 전 프놈펜에서 마지막 미국인을 탈출시킨 해병 중(重)헬리콥터 편대가 또다시 준비 태세에 들어갔다.

6,000명의 해병과 270대의 항공기를 거느린 기동함대는 사이공의 비상 탈출 작전 ‘프리퀀트 윈드’에 대비해 4월 20일께 대기 태세로 있으면서 4월 29일을 맞이했다.

 

국기를 내려야지, 국기를!

 

한국대사관은 화급한 북새판이었다. 공관원들이 대사 집무실에 모여 잠깐 숨을 돌리고 있던 오전 9시.

전화벨이 요란히 울렸다. 경제협력실 이상훈 참사관이 수화기를 들었다. 전화를 건 상대는 미국대사관의 톰슨 1등 서기관이었다. “한국대사관원 철수 비행기를 준비할 테니 2시간 내에 긴급 철수 준비를 하라는 연락입니다.”

 

이 순간 대사관은 기능을 중단했다. 김영관 대사는 긴급 지시를 내렸다. “통신 장치를 파괴하시오.” “두 가지 다 말입니까? 본국 통신 시설도 파괴합니까?” “아니, 엘에스티 교신 시설부터 파괴하지. 본국 통신 시설은 조금 뒤에, 1시간 뒤에. 알았지요?”

중앙정보부 소속 공사 이대용이 다시 물었다. “전원이 다 철수합니까?”

“다 가지요. 나도 가고 다 가야지요.”

 

사이공을 벗어난 엘에스티와의 교신을 맡아 대사관에 남아 근무하던 통신사 변종건 중사, 전자사 김형태 중사는 이문학 중령의 명령을 받고 AN/VRC-46 단파 송수신기와 AN/URC-58 중파 송수신기를 밖으로 끌어냈다. 통신시설의 정비와 점검을 맡은 전자사 김 중사는 기계를 파괴하려고 도끼를 번쩍 들었다. 그러나 아까워서 차마 내리치지를 못했다. 이를 본 변 중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뭣 하는 거야. 이리 내! 내가 하지.”도끼를 뺏어 들자 두말없이 두들겨 부쉈다. 두 사람은 산산조각이 난 송수기의 잔해를 뒤뜰 소각장에 들고 가 휘발유를 붓고 불을 질렀다. 불길이 솟아올랐다.

 

“국기를 내려야지, 국기를!”

김 대사가 다급하게 소리치며 게양대 앞으로 뛰어갔다. 참사관 이상훈, 공사 이대용 그리고 영사 안희완이 뒤따라 달려갔다. 이 장면을 보자 나는 프놈펜이 무너질 때 미국 주재대사 존 건더 딘이 성조기를 말아 들고 뛰쳐나오는 장면을 잡은 미국 AP통신 사진이 떠올라 카메라를 겨냥했다.

“천천히 내리세요, 천천히, 대사님은 이쪽으로 얼굴을 돌리세요.”

천천히 그러나 삽시간에 국기는 끌어 내려지고 셔터는 연방 찰칵 소리를 울렸다. 김 대사는 태극기를 말아 들고, 옆에 대기한 공관 1호 차 검은색 캐딜락에 올랐다.

 

남은 공관원들은 짐을 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나의 대학 선배인 무관 정영순 대령도 민첩하게 가방을 챙겨 들고 잔디밭을 가로질러 자동차로 달려갔다. 그 뒤로 보좌관 이달화 소령이 뛰었다.

사진=그로부터 14년이 흐른 1989년 4월 28일 안병찬 특파원은 논설위원이 되어 14년 만에 최후의 태극기가 강하되던 그 자리에 섰다. 안병찬 제공

 

 

‘마담 빈’의 전설

 

베트남의 혁명1세대 지도자 가운데 내가 직접 만나 인터뷰한 인물은 응우옌 티 빈 여사이다. 항미전쟁 시기에 그녀는 베트남임시혁명정부 외교장관으로 파리평화회담 대표로 활약해 전설의 ‘마담 빈’이 되었다.

나는 2008년 7월 한국일보가 하노이대우호텔에서 주최한 미스코리아 후보들의 ‘한국ㆍ베트남 문화교류 한복패션쇼’에 동행했다가, 뜻밖에 주빈석에 앉아있던 전설의 마담 빈을 만나 인터뷰할 기회를 잡았다. 그날 83세의 빈 여사는 밤색 아오자이에 흰 바지를 입고 나와 한복 행진을 열심히 바라보면서 “아름답다”를 연발했다.

 

마담 빈은 그의 나이 40대 초 5년간 파리에서 외교활동을 펴면서 세계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그녀가 파리평화회담 석상이나 런던 트라팔가르 광장의 핵감축운동(CND) 집회에서 연설할 때면 세계 언론은 난리법석을 쳤다. 빈 여사는 뜻밖에도 한국인 홍선 하노이 허머스앤선개발 대표를 양자로 두었다. 호찌민국립대학교 법대를 졸업한 홍선 대표는 그때 유창한 동시통역실력으로 한국일보 인터뷰를 손쉽게 연결했다.

 

이번에도 홍선 대표에게 빈 여사의 인터뷰를 주선하도록 요청했으나, 4·30행사에 참석하러 호찌민시에 가서 성사되지 않았다. 홍선 대표는 한국일보를 위해서 다음 기회에 인터뷰를 주선하기로 약조하고 빈 여사가 며느리 정수영 씨(34세), 손녀 혜빈이(2세)와 함께 단란한 한 때를 보내는 장면의 사진을 제공했다. 미국계 법률사무소에 근무하는 정수영 씨는 홍선 대표의 부인이고 혜진이는 그들의 딸이다.

 

파리의 밀서

 

일찍이 한국일보 정광모 논설위원은 나를 만나면 이런 농담을 던지곤 했다.

“왕초가 안병찬 키워서 잘 부려먹었지.” 왕초란 당시에 한국일보 기자들이 장기영 사주를 부르는 별칭으로 그가 나를 지명해 사이공에 투입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본래 한국일보는 기자를 적재적소에 투입하고 배치해 기선을 제압하는데 능숙하여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한국일보는 통일베트남에 나를 재투입하면 의미가 클 것이라고 생각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982년, 주불특파원으로 파리에 부임하여 다섯 달이 지난 어느 날 나는 밀서 한 통을 받았다. 김용정 외신부장이 조두흠 편집국장의 이름으로 작성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급히 전할 내용은, 안 특파원이 7년 전 사이공에 특파되어 많은 활약을 했음을 우리 모두가 기억하는 터에 최근 방콕의 손위수 공보관이 주선하여 안 특파원을 잠깐 오늘의 사이공으로 특파하도록 계획 중에 있습니다. 다행이 상대방(국)은 안 특파원의 비자를 발급하는데 협조하겠다고 약속했다니 취지와 계획을 새겨들으시고 파리 월맹대사관에 비자 신청을 하도록 하십시오. 물론 타지 특파원에게는 비밀로 하시고…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기획이오니 명심해 주실 것을 아울러 부탁드립니다. 여불비 1987년 8월27일.”

 

손위수 공보관으로 말하자면 한국일보 견습기자 25기 출신이다. 즉시 파리 제16구 보아료 16번지에 있는 베트남민주공화국대사관을 찾아가 마이 반 보 대사 앞으로 내는 한국일보 공문을 첨부하여 비자를 신청했다.

“양국 상호 이해와 상호 이익에 부합하는 내용을 취재 보도하고자 귀국을 방문하려 하니 입국비자를 발급해 주기 바란다.”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베트남대사관 공보담당 영사를 면회해 독촉했으나 하노이에 송부하여 회송을 기다릴 뿐이라는 응답이었다.

 

그로부터 2년 5개월이 지나갔다. 이번에는 이재승 외신부장이 팩시밀리를 통해서 통일 베트남 취재 건을 다시 거론했다.

“시간이 있으면 베트남대사관에 비자 건에 관해서 후속조치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물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요즘 미국 신문들을 보니 주요 매체들이 10주년 기념특집을 이미 현지 르포로 내놓고 있습니다.”

그 사이 베트남 대사는 하 반 라우로 바뀌어있었다. 전과 마찬가지로 대사 앞으로 보내는 공문을 첨부하여 또 한 번 비자신청서를 냈으나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나는 특파원 임무교대로 논설위원 발령을 받고 귀임했다.

서울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난 1989년 4월, 마침내 사이공이 소멸하고 호찌민시가 생겨나던 그 날에 맞추어 그 도시에 입국할 길을 열었다.

 

김포공항에서 방콕으로 날아가는 대한항공기 안에서 나는 문득 기장이 한국일보 출신 이강흔 씨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잠시 후 기내 방송으로 ‘캡틴 이강흔’ 이름이 흘러나온다. 이강흔 기장은 1960년 한국일보 항공부를 창설하고 취재기 L-5와 L-19를 조종한 기장이다. 나는 명함에 “얼마만입니까. 앞자리에 있으니 얼굴 좀 뵙시다”하고 적어서 여승무원을 불러 기장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조종실에 들어가서 그와 재회하고 항공기가 다낭 항로로 진입할 때 베트남 땅을 내려다보는 기회를 얻었다.

1

989년 4월 27일 13시 30분, 나는 베트남항공의 소련제 TU-135기로 탄썬녓 공항에 도착하고, 4월 28일 새벽 4시 독랍호텔 객실에서 눈을 떴다. 멀리서 새벽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14년 만에 통일베트남을 다시 찾은 나는 22일 동안 곳곳을 탐방한 끝에 저서‘베트남, 오늘의 베트남’(한국일보사 출판국)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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