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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르타주 저널리즘

미니회고-‘ 안깡’의 현장 이야기

 

 

[미니 회고]

 

 

안깡’의 현장 이야기

 

 

 

 

풍 파

 

대학에서 전공한 것은 항해학이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무렵인가, 견장이 달린 제복을 입고 금테 두른 사관모를 쓴 국립해양대학생 선배 2명이 모교를 찾아와서 졸업반을 모아놓고 입시홍보를 했다. ‘우리대학은 학비 면제, 숙식 및 관복 공짜에 군 면제의 특전이 있다. 게다가 상선사관(商船士官)이 되어 세계를 여행한다’, 그런 감언이설에 넘어갔다.
그런데 졸업하자마자 뭍으로 올라오고 말았는데 그 사연은 이렇다. 4학년이 되어 견습사관 자격으로 생전 처음 상선을 탔다. 내가 탄 목포호(대한해운공사 소속)가 추운 겨울밤 묵호항에서 닻을 올리고 일본 홋카이도 최남단의 쓰가루 해협을 향해 동해를 서북 방향으로 가로질러 가는데 운수 사납게 ‘7급 폭풍’을 만났다.
풍파의 세기는 ‘보퍼트(Beaufort) 풍력계급표’로 13단계로 나뉘는데 무풍은 0급이고 싹쓸바람 또는 태풍(허리케인)은 12급이라 한다. 7급의 풍랑 에 철선인 목포호는 좌우로 35도씩 구르고(롤링) 전후로 널뛰듯이 뒷질(피칭)하면서 파도 꼭대기로 치솟아 올랐다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그러면 3,500톤급 선체는 해면과 충돌하는 순간 이른바 수격작용(워터해머링)의 충격으로 부르르 떤다. 그 공포의 항해는 쓰가루 해협에 들어서기까지 꼬박 3일 반이 걸렸는데 나의 뱃멀미는 극점에 달했다. 항해 기간 내내 선실 침대에 누워 토하고 신음하느라 선교(船橋)에 올라가 당직을 서지 못했다.
결국 뱃멀미가 유죄라 풍파에 놀란 사공이 되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나
 그 이전 대학 2학년 때부터 이미 마음속에 신문기자가 되고자 하는 꿈을 심었다.

 

구보의 계단

 

서울 종로구 중학동 14번지. 창간발행인 장기영이 거느리는 한국일보는 초록색 사기(社旗)를 올리고 견습기자 제도를 최초로 도입하여 젊은이들을 부르고 있었다. 배를 버린 후 충주농업고등학교에서 6개월 한 학기 동안 교사 생활(영어와 세계사 담당이었다)을 한 내가 한국일보에 입문한 것은 1962년 3월이다. 올챙이 견습기자 시절 ‘사쓰마와리’(경찰기자) 노릇을 하면서 신역이 고달플 때면 저절로 “풍파에 놀란 사공 배 팔아 말을 사니 구절양장(九折羊腸)이 물 도곤 어려왜라…” 하는 장만(張晩)의 평시조가 슬며시
떠올라 실소하곤 했다.
장기영은 ‘왕초’ 또는 ‘사주’로 불렸다. 한국일보 사옥 계단 모서리에는 ‘기자의 계단, 구보의 계단’이라는 왕초의 격문이 나붙어 있었다. 한국일보  편집국은 왱그랑댕그랑하며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충만했다. 사회부 서열 말석인 사쓰마와리들은 선배들 하나하나에 애칭(별명)을 부여하고 킬킬거렸다.

장 사주는 항시 검은 바지에 흰 와이셔츠 소맷자락을 걷어붙인 차림으로 편집국으로 올라와 국장석을 점령하고 걸걸한 음성으로 사방팔방에 풍랑을 일으키곤 했다.
어느 날 장 사주가 국장 자리를 차지하러 편집국을 횡단하는데 이원홍 사회부장의 머리 위 벽면에 텔레타이프의 두루마리 용지를 펴서 만든 월급투쟁 현수막이 버젓하게 나붙었다. 편집국 기자들이 작당하여 짓궂게 항의하는 구호는 이랬다.
“장 국장, 쥐꼬리 봉급이 너무 많소이다.”

그러나 국장석을 향해서 성큼성큼 전진하던 장 사주는 그 현수막을 한 번 힐끗 쳐다볼 뿐 걸음은 멈추지도 않고 강준원 서무부장에게 고개 동작으로 “저거 떼세요!” 하고 한마디, 자기 자리(국장석)로 가버렸다. 그러고도 편집국은 여전히 생기로 술렁대는 것이었다.
1962년 12월 31일 저녁, 편집국은 냉주 파티로 그해를 마감하고 있었다. 한 떼의 기자들한테 둘러싸여 있던 장 사주가 갑자기 부르는 소리가 크게 울려왔다.
“어이, 해양대학!”
배를 버리고 말로 바꾸어 탄 올챙이 견습기자에게 왕초는 냉주 한 잔을 듬뿍 부어주었다.
1963년 11월 10일 낮, 해방촌에 모자피살사건이 일어났다는 독자 제보가 들어와 구보의 계단을 뛰어내려 현관문을 나섰다. 마침 장 사주가 전용차인 검은색 윌리스 지프차에 막 올라타려다가 나를 보더니 묻는다.
“어디 가나?”
“해방촌 현장에 갑니다.”
“그래! 그럼 이 차를 타고 가게. 그 대신 가는 길이니 나를 반도호텔까지만 태워줘.”
나는 장 사주를 반도호텔에 내려주고 의기양양하게 살인사건 현장으로 급행했다. 내가 서울시경찰국 수사본부보다 앞질러서 ‘해방촌 일가족 몰사사건’을 완전히 해결하여 대특종한 것은 그 이튿날 새벽이다.

 

시체실의 멜로디

 

해방촌 일가족 몰사사건’은 실직한 가장이 잠든 아내의 머리를 망치로 가격하고 세 살 난 아들의 목에 오랏줄을 매어 살해한 후 자신은 남산 고가육교에서 투신자살한 사건이었다.
그 사건에 매달린 나는 사회부 홍원기 선임의 육감에 따라 새벽을 틈타서 단신으로 용산구 원효로 1가의 시립남부병원 영안실에 과감히 잠입했다. 남대문경찰서는 투신한 남자를 신원미상 변사자로 분류하여 이 병원에 안치했는데 그 시신이 과연 처자를 살해한 가장과 일치하는지 확인할 목적이었다. 앞서 피살된 모자의 시신도 용산경찰서에 의해 같은 영안실에 미리 안치되어 있었다.
11월 11일 새벽 3시, 나는 어렵게 집주인을 섭외하여 영안실로 이끌고 들어갔다. 그는 내가 얼굴을 덮은 흰 천을 들추는 순간 “이놈이다!” 하고 소리쳐 마침내 투신한 남자가 바로 처자를 살해한 진범임을 확인했다.
냉기 도는 심야의 시체실 안 으스름한 전등 아래서 최고조의 희열을 맛본다는 것은 별난 일이다. 미궁 속에 경찰 수사본부가 깊은 밤잠에 떨어진 늦가을 밤, 나는 불 속에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시체실에 뛰어들었고 사건을 해결한 순간 황홀경에 도달했다. 영안실이 환하게 빛나고 시체실의 멜로디가 울려 퍼지는 듯했다. 견습기자 딱지를 떼고 불과 1개월, 전무후무한 특종이었다.
그간 경찰은 오리무중에 탐문을 강화한다, 형사대를 지방에 급파한다 하며 부산을 떨다가 그 시간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사건기자로 편입된 나는 그 후 중앙일보와 한국일보 두 일간지에서 시경캡을 역임하여 당시로는 최장수 기록을 세웠다. 시경캡이 일단의 사쓰마와리에게 직업훈련 교관 노릇을 하는 전통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장기영과 사이공

 

1975년 3월 21일, 외신부에 근무하고 있는데 책상 앞 전화가 크게 울렸다. 장기영 사주가 나와 다짜고짜 몰아친다.
“안병찬 씨, 당장 출발 준비하세요! 즉시 사이공으로 떠나요.”
장 사주의 구두 명령일하, 나는 축구의 내차고 돌진하는 전법(킥앤드러시)을 써서 토요일이 휴무인 월남대사관에서 사증을 받아내고 일요일에 비행기를 탔다. 한국일보는 양평 기자를 증원 특파했으며 그는 3월 30일부터 4월 25일까지 나와 함께 취재 활동을 했다.
1975년 봄, 북베트남군이 총공세로 통일전쟁을 일으켜 남북은 운명을 건 대판 결전을 벌이고 있었다. 사이공에 도착한 3월 23일부터 38일 동안 들리는 것은 멸망의 초침 소리뿐이고 보이는 것은 특종뿐이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이 두려웠지만 특종욕은 그런 공포심을 제압하고 있었다. 이제는 스스로 결정하여 사이공 패망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와 정면으로 대결할 뿐이었다. 그런데 우리 집은 6·25전쟁에서 아버지와 영영 생이별하여 이산가족이 되었기에 베트남전쟁으로 2대째 이산가족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 큰 부담이었다.

 

 

 

 

 

 

사진=사이공 탈출 후 남중국해 피난선 밀러 호 상갑판에서, 1975년 5월 2일 낮.]


1975년 4월 30일 새벽 4시 10분, 나는 천신만고 끝에 미국 해병대의 마지막 치누크 헬리콥터에 뛰어들어 패망한 사이공을 공중탈출한 후 남중국해상의 미국 7함대 피난선 서전트 밀러 호에 수용됐다. 이어 필리핀 수비크 만의 미군 기지에서 미국 괌 섬의 타무닝 난민수용소로 이어지는 피란 경로를 거치는 5일 동안 한국에서 나는 실종자로 되어 있었다.
괌에서 김포국제공항에 귀환한 것은 사이공으로 떠난 지 51일 만인 5월 13일. 르포르타주 《사이공 최후의 새벽》을 탈고한 것은 불과 한 달 만인 6월 중순이다.

나는 권두의 말을 받고자 장기영 사주의 10층으로 올라갔다. 10층은 장 사주가 거실을 겸해 집무실로 쓰고 있는 총지휘부를 가리켰다. 장 사주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선뜻 응낙하더니, 손수 200자 원고지 2장에 만년필로 쓴 권두의 말을 이틀 만에 넘겨주었다. 과연 장 사주는 그렇게 다채로운 뜻을 그렇게 짧은 글에 담을 줄 아는 탁월한 게이트키퍼였다.

 

 

[권두에]

           張基榮

 

전진할 때는 선봉(先峰) 부대와, 후퇴할 때는 최후미(後尾) 부대와 행동하는 것이 기자(記者)다. 그래서 그 위치는 항상 위험하다…. 안 특파원이 4월 29일 상오 10시 30분, ‘사이공 최후의 새벽’을 타전하고 연락이 두절된 120시간 동안 나는 물론 불안하였다. 그러나 나는 안 군의 무사 탈출엔 자신을 가지고 그의 가족에게 되묻기까지 하였다.
‘당신 남편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사지에서 헤어 나올 기략(機略)과 용기를 가지고 있는데, 어떠냐?’고…. 안 특파원은 해양대학 출신이었다. 미세스 안의 대답도 태연하고 맑았다. ‘아마 그럴 거예요.’
이런 것은 안 특파원을 해가 떨어진 월남 밤길에 내보낼 때 나로서는 깊이 계산했던 것이다. 뜻밖에도 호놀룰루 최갑식 특파원으로부터 ‘BYUNG CHAN ·AHN’ 이름을 태평양통합사령부에서 발견하였다는 제일보를 받고 나는 흥분하면서도 안 차장이 월남 패망의 역사적 순간을 지켜보고 돌아오는 유일한 한국 기자가 된 것을 마음속으로 축하했다.
‘당신은 기자로서 할 일을 다 하였다.’ 돌아온 후 회사에서 그에게 준 위로표창장의 안문(案文)의 한 구절을 나는 이렇게 고쳤다.
                                                         1975년 6월 20일.”

 

장 사주가 써준 이 서문은 조세형 논설위원이 “명문인데, 잘 썼어” 하고 몇 번 씩 감탄할 정도의 명문이었다.
일에 관한 한 그는 지나치다고 할 만큼 욕심이 많았다. 사이공 패망을 눈앞에 둔 1975년 4월 23일부터 4월 26일 사이에 장 사주는 사이공의 나에게 3통의 지급전문을 보냈다.

다음은 4월 23일에 날아든 장기영 사주의 전문이다.

 

“지급. 한국일보 안병찬 수신.

만약 불행히도 사이공이 함락 직전에 놓이면 사이공의 최후 표정을 컬러로 찍고 돌아오라. 양평 기자가 엘에스티(LST)를 타면 엘에스티 타는 모양을 찍으라. 현지 사이공의 표정과 사이공 군대의 분투하는 상황도 찍어 달라. 베트콩 사진을 찍으면 좋겠으나 그런 위험한 일은 안 했으면 좋겠다. 장기영.”

 

베트콩 사진을 찍으면 좋겠으나 그런 위험한 일은 안 했으면 좋겠다고? 이 모순된 말은 베트콩을 사진으로 포착하는 위험한 일도 무릅쓰기를 바라 마지않는 그의 기사 욕심을 잔뜩 담고 있었다.
나는 월남 패망의 최후를 현장에서 취재하고 《사이공 최후의 새벽》을 출간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해 11월 역대 최연소자로 서울특별시문화상(언론부문)을 수상했다.

1977년 3월, 홍콩대학에서 연수하던 나는 봄방학에 일시귀국하여 장 사주에게 인사하고자 10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신문이 이제는 중국대륙에 진출할 날에 대비하여 중기계획을 세울 때라고 진언했다. 장 사주는 왠지 여느 때처럼 “그렇지!” 하고 즉시 반응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20일 뒤, 홍콩대학 기숙사에서 장기영 사주가 타계했다는 긴급전화를 받았다.

 

 

 

 

 

[30년 만에 가족들과 찾은 그 때 그 국기게양대. 1975년 4월 20일 사이공 최후의 국기강하식 촬영(오른편), 2010년 12월.]

 

 

香 港

 

사이공의 최후는 바로 통일베트남의 시작이었다. 사이공에서 취재의 준봉(峻峰)을 넘고 나니 잠시 호주머니가 허전한 듯 공동(空洞) 증상이 밀려왔다. 결국 새로운 목표를 중국대륙으로 돌리는 것이 상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는 최정호 논설위원이 선견지명으로 거듭하여 충언해준 덕이 컸다. 나 역시 일찍부터 탈오리엔탈리즘의 정당성을 지지하여 아시아적 시선으로 세상을 읽어내야 한다고 생각해오던 터였다.
한국은 한자어가 있는데도 주로 미국과 서방의 시각에 의존해서 중국을 보아왔다. 예를 들자면 일명 ‘4대 괴물(몬스터)로 불린 서방의 4대 통신사가 모택동의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을 그레이트 프롤레타리아트 컬추럴 레볼루션(Great Proletariat Cultural Revolution)으로 번역하여 송신하는 형편이니 웃기는 일이었다.

나는 남들이 선호하는 미국과 유럽, 일본을 제쳐놓고 香港(홍콩)을 유학지로 정했다. 성곡언론문화재단의 연수장학생 선발시험을 통과하여 홍콩대학 구내에 있는 로버트 블랙 칼리지(栢立基爵士堂)에 짐을 푼 때는 1976년 9월. 홍콩을 식민경영한 제25대 영국 총독 로버트 블랙 경(爵士)의 이름을 붙인 동양풍의 영빈용 기숙사다.
1970년대 중후반은 중국대륙이 대전환을 시작하던 무렵이다. 가서 보니 홍콩은 동방과 서방이 만나는 단순한 이국풍의 무역항이 아니었다. 모택동의 신중국 선포일인 10월 1일이 되면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의 오성홍기가 곳곳에 나부낀다. 그 열흘 뒤 쌍십절에는 장면이 일변하여 대만의 중화민국 청천백일기가 여기저기 내걸린다. 또 6월 어느 날은 영국 국기인 유니언잭이 대로를 장식한다. 과연 홍콩은 식민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중국 공산주의가 공통의 이해라는 기조 위에 현상을 유지하고 있는 삼면수의 흥미진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홍콩대학 특설 어언연습소에서 고급과정 제2학년생으로 중국 표준어인 보통화(普通話)와 간체자(簡體字)를 익히면서 동양의 감각으로 중국대륙을 파악해 나갔다.

무엇보다 흡족한 일은 중국의 양보일간(兩報一刊)을 마음 놓고 얼마든지 구독하는 것이었다. 중공중앙 기관지 〈인민일보〉와 인민해방군 기관지 〈해방군보〉 그리고 중공중앙 이론지 〈홍기잡지〉였다. 그 외에 당 이론지인 〈역사연구〉와 선전부 당보인 〈광명일보〉, 친중국계 신문인 〈대공보〉 및 〈문회보〉, 월간지인 중립계 〈명보〉 및 우익계 〈경보〉 등 수많은 간행물을 자유롭게 열독하고 중국 직영서점인 상해인서관(上海印書館)을 수시로 드나들며 적지 않은 자료를 수집했다.

1977년 4월 어느 날 상해인서관에 들러보니 눈에 번쩍 띄는 책 한 권이 진열대에 놓여 있다. 방금 출간된 최초의 중국어판 《아리랑》이다. 제목은 영문 원제(Song Of Ariran)와 함께 중국어로 ‘중국혁명의 대오 속에서(在中國革命隊伍裏)’라고 병기했다. 저자는 님 웨일스(미국) 및 金山(조선), 출판처는 홍콩남월출판사다. 나는 홍콩에서 중국판 《아리랑》을 구입한 첫 번째 한국인일 것이다.
16년 후인 1993년, 〈시사저널〉의 제작운영 책임을 맡고 있던 나는 이 최초의 중국어판 《아리랑》을 디딤돌 삼아 ‘민족통합의 노래, 김산의 아리랑-60년 만의 추적 재평가’라는 제목으로 15쪽에 걸친 커버스토리(제205·206 합병호, 1993년 9월)를 제작했다. 그때 새로 발굴한 것은 김산의 시 ‘한해 동지를 조문하여(弔韓海同志)’다. 한해는 1930년 6월 27일 오후 2시 남대문감옥에서 옥사한 항일운동가다. 또 최초의 한글판 《아리랑》이 1946년에 창간호를 낸 월간 《신천지》에 16개월간 연재(번역자 신재단)된 사실을 국회도서관에서 확인했다.

 

시실리언 A씨

 

한국일보 편집국은 정보를 수집하면서 유기적으로 숨 쉬는 하나의 조직인(組織人)이라고 볼 수 있었다. 시절이 좋을 때는 편집국 구성원이 한데 어우러져 협동작업을 하는 것을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협연으로 비유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편집국 서무인 유강호는 문학소녀였다. 작은 섬에 오도카니 앉아 편집국을 관망하던 그녀는 어느 날 ‘막이 내리지 않는 무대’라는 제목으로 《한국일보사보》에 수필을 썼다.
오케스트라를 생동감 넘치게 연주하는 편집국의 하루, 컨덕터인 편집국장 지휘 아래 각 부서의 다양한 기자들이 저마다의 개성으로 악기를 연주한다. 그 가운데서 나는 과연 무슨 악기의 연주자로 무대에 등장할까 은근히 궁금했다. 유강호는 나의 역할을 심벌리스트로 규정하고 다음과 같이 썼다.
“부원들이 빚어내는 유머와 위트로 얽힌 소음, 박장대소를 ‘딱!’ 멈추게 하는 ‘심벌즈’, 끊임없는 텔레파시 담긴 시실리언 에이(A)씨의 차갑고도 뜨거운 두 눈이 순조로운 항해를 알레그로 모데라토로 서두르면 하오 3시 30분….”
내가 타악기인 심벌즈 연주자라면 교향악의 절정을 알리는 역할이 아닌가. 내가 후배들을 도제식으로 단련시키고 여러 차례 언론자유수호 선언을 주도해서 풍파를 일으킨 일들로 심벌즈를 쳐 올리는 시실리언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유강호는 관념과 행동 사이에서 고민하며 그래도 그때는 행동하는 저널리스트가 되고자 애쓰던 내 모습을 보고 상징적인 타악기 연주자의 지위를 부여한 것이 아닌가 짐작하고 있다.
대륙만화경
옛날 한국일보 사회부에 3김이 있었다. 김성우, 김중배, 김창열 3차장이다. 우리 올챙이 사쓰마와리들은 김성우 차장의 검은 얼굴과 매부리코가 인디안 같다고 그에게 ‘코만체로’라는 별칭을 붙였다. 김중배 차장은 둥글고 착한 얼굴로 슬슬 웃기만 하여 ‘애기’라고 불렀다.

검은 테 안경을 쓴 김창열 차장은 생각이 깊은 듯 기사의 맥을 잘 짚는 천생 기자였다. 그의 별호는 ‘미네르바의 부엉이’를 생략하여 ‘부엉새’였다. 그는 일로써 끊임없이 나를 압박했다.
1977년 6월 홍콩대학에서 3학기를 마치고 방학을 맞아 일시 귀국했을 때 김창열 국장이 나를 부르더니 뜻밖의 제안을 한다. 한국일보가 지원하는 고상돈 대원의 에베레스트 등반대에 합류하여 카라바닝 등정 과정을 동행취재하면 좋겠다는 것이다. 귀가 솔깃한 취재 임무였으나 며칠간 고민한 끝에 고상돈 동반취재를 포기하고 홍콩대학으로 복귀하여 중국 공부를 계속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때부터 정확하게 3개월 뒤, 중문대학으로 옮겨 공부를 더 하기로 결정하고 일시 귀국했을 때 고상돈 대원이 마침내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는 급보가 날아왔다.

 

장강재 사장의 주재하에 긴급 대책회의가 열렸다. 장강재 사장이하 간부들은 고상돈 등정대가 김포공항에 귀국하면 어떻게 축하 퍼레이드를 벌일까 논의하자고 했다.

나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 에베레스트 정상 사진을 받아서 한국일보 지면에 올리는 긴급하다”고 진언했다. 내 의견이 채택되었다. 그대신 나는 김창열 국장의 명에 따라 한국일보 본사로 정상 필름을 운반하는 짐꾼(포터)의 무거운 임무를 맡았다. 나는 취재단에 합류하여 즉각 네팔의 카트만두로 날아갔다. 도착하자마자 베이스캠프에서 헬리콥터로 실어 보낸 역사적인 정상 필름을 받아 들고 뛰었다. 그 귀중한 필름을 담은 행낭을 끌어안고 인도의 뉴델리로 돌아 나와서 방콕을 거쳐 귀사했더니, 이어서 일본 도쿄로 날아가 필름을 손일근 지사장에게 넘겨 현상해 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틀 만에 도쿄에서 운반해 온 정상 사진은 그 즉시 한국일보 지면을 뒤덮었다.
“1977년 9월 15일 12시 50분 에베레스트 한국원정대 고상돈 대원이 셰르파  펨바 노르부와 함께 에베레스트 8,848m 정상에서 태극기를 들어 정상 정복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그는 ‘여기는 정상’이라는 말로 정상에 선 마음을 표현했다.”
이렇게 에베레스트 정상의 특종을 긴급 특송하는 막후 역할을 무사히 수행했다.

홍콩 연수를 마치고 외신부로 귀임한 것은 그해 말이었다. 내 고민거리는 산적한 중국의 1차 자료를 어떻게 소화할까 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김창열 편집국장이 외신부 내 자리로 슬슬 걸어오더니 검은 테 안경을 고쳐 잡으며 말을 걸었다.
“안 공, 중국대륙에 관한 글을 연재하는 게 어때? 제목은 대륙만화경으로 하지.”
보아 하니 김창열 국장은 이미 맘속으로 내가 홍콩에서 중국 물이 든 것에 주목하고 큰 짐 여러 개에 담아온 중국 생 자료를 우려먹으려고 작정하고 온 것을 알겠다. 김 국장이 정한 주제의 커트는 한자로 ‘대륙만화경(大陸萬華鏡)’, 부제는 ‘홍콩창구에 비친 중공’이었다.
1978년 1월 23일 첫 회 기사는 제목이 ‘홍루몽 노선(紅樓夢 路線)’으로 1면에 8단을 할애했다. 나는 중국티가 물씬 나는 현지 용어를 사용하며 16회를 써내려가고 때로 현지 용어를 설명하는 각주를 붙였다. 이 기획연재를 계기로 단행본 《중공·중공인·중공사회》를 펴냈는데 김창열 국장은 추천사에 ‘사건기자의 눈으로’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는 내가 신문기자치고도 뉴스 욕심이 지나치다면서 ‘대륙만화경’이 중공의 정치 및 권력구조·사상체계뿐 아니라 범죄·애정생활·대중문화 구석구석에까지 눈이 미처 독특했다고 치사해 주었다.

 

한국일보 필진 세계를 가다

 

1970년대에 나는 한국일보에서 해외출장비를 가장 많이 쓴 기자였다. 김창열 편집국장의 후임인 조세형 편집국장은 주로 해외용으로 나를 혹사했다. 그는 유명한 별칭(‘조코’라고 불렸다)을 달고 있었는데 파이프를 멋지게 물고 다니던 논설위원 시절부터 나를 지도했다. 심상치 않은 공기 속에 사이공 전선을 향해 떠나기 직전 어느 날, 조세형 논설위원은 나를 조용한 곳으로 안내하여 이렇게 말해주었다.
“사태는 심상치 않다. 힘껏 뛰고 유감없이 기사를 써라. 그러나 이것과 네 목숨과를 바꾸지는 말라.” 그러면서 그는 미국 <뉴욕타임스> 기자 찰스 모어의 말대로 “전장에서 용맹을 날리는 것은 아무래도 병사이다. 기자는 살아남아서 송고를 해야 한다”는 직업적 사명감을 일깨웠다. 그는 또 사이공의 최후를 취재하고 살아 돌아와 신문연재를 마친 나를 전화로 불러 올려 이렇게 말했다.
“지금부터 당장 책을 써! 지금 내려가서 당장 착수해요!”
이 충언에 동력을 얻는 나는 바로 집필하여 한 달 간 밤낮으로 맹렬하게 작업한 끝에 졸저 《사이공 최후의 새벽》을 탈고할 수 있었다.

조세형 국장은 1978년 초 부임하자마자 중국어를 전공한 김용정 군과 나를 홍콩으로 특파했다. 나는 신상옥 감독이 아내인 배우 최은희를 쫓아 북한으로 넘어가기 전야에 그를 홍콩 그랜드호텔 방에서 마지막으로 인터뷰한 경력이 있었다. 나는 홍콩에 23일간 머물며 현장르포로 충동과 의문의 국제도시 ‘香港’을 연재했다.
‘한국일보 필진 세계를 가다’는 조 국장이 한국일보 창간 24주년을 기념하여 1년간 연재하도록 기획한 초대형 야심작이었다. 그가 배치한 6인의 필진은 이형 편집국장대리(중남미), 정경희 논설위원(미국), 김창열 논설위원(일본), 김성우 주불특파원(유럽), 김해도 사회부장(중동·아프리카)이었다. 모두 한국일보의 쟁쟁한 선배 필객들이다. 외신부 차장으로 말자인 나에게는 동남아시아를 맡겼다.

 

게이트키핑 한국일보

 

나는 유일하게 한국일보를 논구의 대상으로 삼아 석사학위 논문과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1975년에 낸 서울대학교 신문대학원 문학석사학위 논문은 ‘외신의 게이트키핑 과정에 작용하는 요인 분석’이다. 한국일보사 편집국을 중심으로 한 사례 연구였다. 나는 게이트키핑 연구가 한국에서 아직 불모지이기에 우선 문헌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이어 한국일보 편집국 조직 내의 동태적인 정보 흐름과 뉴스 취사선택과정(게이트키핑)을 참여관찰법과 경험주의적 방법론(가설검증의 본 분석)으로 고찰했다.
또 1999년에 쓴 한국외국어대학교 박사학위 논문은 게이트키핑 모형을 원용하여 ‘한국일보 창간인 장기영의 사례’를 논구한 것이다. 이 논문은 도서출판 나남이 《신문 발행인의 권력과 리더십―장기영의 부챗살 소통망 연구》라는 이름을 붙여 단행본으로 발간했다. ‘왕초’라는 애칭을 얻은 장기영의 우두머리 기질(헤드십)의 명(明)과 암(暗)을 해부한 것이 관심을 끈 것이다. 나는 주 텍스트인 《백인백상(百人百想)―우리가 아는 장기영 사주》 전 3권에서 관련자 900명이 진술하는 장기영의 다채로운 특징을 구조주의 해석학적 담론분석, 인터뷰 방법론, 참여관찰 방법론, 게이트키핑 이론 등을 동원해서 고찰했다.
나는 백상 장기영의 행태적 특징을 다음 일곱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듣는다(경청 행위) ▶둘째, 묻는다(지식욕) ▶셋째, 발로 뛴다(현장주의) ▶넷째, 되묻는다(확인) ▶다섯째, 읽는다(다독가) ▶여섯째, 말과 글을 활용한다(언어 조탁) ▶일곱째, 마주 본다(면대면 커뮤니케이션). 이처럼 그의 인격이 발휘하는 에너지는 출중했다. 그는 중심점에 서서 기자들을 상대로 ‘부챗살’ 소통망을 구축했는데, 그 부챗살은 바로 장기영의 권력과 리더십의 출발점이었다.
장기영은 스스로 한국일보를 ‘전 10년의 영광과 후 10년의 고난’이라고 구분해서 말했다. 그러나 ‘후 10년’은 고난이라기보다 오욕의 시기였다. 장기영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입각하고 유신체제라는 초헌법적 강압적 정치환경 속에서 집권여당 소속으로 정치행위를 하면서도 한국일보 사주로서 계속하여 조직을 운영했다. 언론의 자유가 압살당하기 직전에 놓인 상황에서 장 사주가 이처럼 상충하는 두 목표를 추구하면서 한국일보 조직은 심히 갈등했다. 그 심각한 모순은 급기야 ‘고난의 후 10년’ 후반에 노조운동의 격렬한 저항을 불렀다.
 

파리 귀양살이

 

사건취재를 하던 중 맨 처음 맞닥뜨린 것은 기자실 문제였다. 저널리스트의 나태와 비리를 키우는 기자실 풍토를 경멸한 나는 미력으로 세 차례에 걸쳐 기자실 및 기자단 철폐 운동을 폈으나 역부족이었다. 군사문화 정치권력은 유신정권의 극단으로 치달았고 젊은 기자들을 비분하게 만들었다. 나는 한국일보 기자들의 언론자유수호 선언을 여러 차례 앞장서서 주도하고 중앙정보부원의 신문사 상주를 거부하는 투쟁을 벌였다. 한국 언론은 언론기업화-언론유신화-제도언론화-어용언론화로 이어지는 네 계단을 밟으며 군사문화의 수인(囚人)으로 전락해 갔다.
유신체제는 베트남 패망의 최후를 현장 보도하고 천신만고로 돌아온 내게 ‘반공주의 국가안보의 당위성’을 선전하는 정권안보용 공보영화를 찍는 데 협조하라고 중앙정보부를 통해 압력을 가해 왔지만 단호히 거절하고 끝내 협조하지 않았다.
언론사 내부는 언론자본과 편집진이 한편에 서고 일선기자들이 이에 맞서는 해괴한 내부분열의 장으로 바뀌었다. 마침내 한국일보는 신문사 초유의 노조운동을 배태하게 되는데, 그 진원지는 내가 차장으로 앉아 있던 외신부였다. 나는 심정적으로 노조운동에 동조하여 지원했으나 직접 가담하지 못해 진퇴유곡의 처지에 빠졌다.

1982년, 신군부 집권초 한국일보 2세 경영자는 나를 주불특파원으로 발령하면서 “가 있으면 좋은 때에 부르겠다”고 회유했다. 나는 전공분야인 중국과 거리가 먼 파리로 나가서 3년간 근무한 것을 귀양살이라고 여기고 있다.

 

춘추필법이다

 

나는 유신체제와 신군부가 언론의 자유를 억압한 오욕의 시대에 간난신고를 감내했다. 저널리즘이 내세우는 ‘리얼리즘’은 뜨거움과 차가움이 만나는 모순과 통합의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본래 저널리즘은 객관주의의 미덕을 강조하지만 이것은 아메리카의 실용적 기능주의의 산물이다. 더구나 암흑기에 객관주의는 권력 추수의 구실로 이용되었으니 그것이 저널리즘 실천의 정답이 안 된다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사건 속에 직접 묻혀서 진실을 캐낸다는 참여 저널리즘, 스스로의 신념에 따라 사건 속에 내재한 진실을 추구한다는 주관주의 저널리즘이나 주장의 저널리즘, 기존 기사 작성법의 틀을 깨고 자유로운 소설 기법을 동원한다는 논픽션 저널리즘은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우리는 이런 뉴저널리즘도 함정에 빠지기는 매한가지라는 사실을 이른바 개혁파의 역 편파를 통해 확인했다. 이와 같이 저널리즘은 분리와 참여, 객관과 사변의 자기모순으로 말미암아 부단하게 마찰음을 낸다.

그리하여 나는 ‘춘추필법’과 ‘실사구시’가 우리 풍토에 적용할 수 있는 값진 저널리즘의 틀이라는 믿음에 이르게 된다.

 

 

 

 

 

 

 

 

 

 

 

 

그림=만화가 고우영이 그린 파리특파원 시절(승용차 안은 아내 이정자), 1983년.

 

 

관훈클럽 내방한 정주영

 

1988년은 한국 언론이 바야흐로 군사문화의 암흑기를 벗어나 지형의 대변화를 예고하며 술렁이던 때다.
관훈클럽 총무로 일하자마자 나는 우선 회보인 〈관훈통신〉을 재창간(1989년 2월 11일자)하고 《관훈저널》에 최초로 광고를 도입하여 흑자를 냈다. 특히 한겨레의 제1호 회원을 입회시키고, 민주언론인으로 고초를 겪은 장기표, 리영희 등 제씨를 초청하여 간담회를 연 일도 의미가 있었다.
나는 현대 총수인 정주영 회장과 벌인 1막 2장의 일화를 잊을 수 없다. 제1장은 왕 회장 정주영의 내습이다.
2월 16일 오후 3시 50분에 정 회장의 이병규 비서실장이 김영성 사무국장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왕 회장이 사무실을 예방하고자 방금 출발했다는 전갈이다. 떠나면서 알려주다니 일방통고나 다름없었다. 왕 회장이 단신으로 사무국에 들이닥친 시간은 4시 5분, 통고가 오고서 15분 만이다. 박강문 편집, 이영덕 회계에 이어 총무인 나, 그리고 박기정 기획이 부랴부랴 사무실에 도착한 직후였다. 왕 회장은 우리가 요청한 대로 관훈토론회에 나가 북한방문 내용을 털어놓지 못하는 부득이한 처지를 해명한 후 도착할 때처럼 훌쩍 일어섰다. 마치 관훈 운영위원회가 정주영 재벌 총수에게 비상소집당한 꼴이었다.
제2장은 21일 후에 벌어졌다. 이병규 비서실장이 한국일보 논설위원실로 총무인 내게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3월 13일 오전 10시 약속시간에 계동 현대본사 12층에 있는 정 회장 집무실에 들어섰다. 그는 뒷짐을 진 채 우두커니 비원 쪽을 내다보고 있었는데 외로워 보였다. 당시 현대는 심각한 노사 분규로 궁지에 몰려 있었다.

정 회장은 금강산 문제만을 토론 주제로 관훈토론회를 열어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그는 국면 전환을 꾀한 것이었다. 나는 금강산 문제와 함께 노사분규 문제도 토론하지 않는다면 형평상 관훈토론회를 열기 힘들다고 거절했다. 면담시간은 50분, 관훈토론은 불발했다.

 

〈시사저널〉 ‘몽골기병들’

 

1988년 겨울 어느 날 한국일보 사쓰마와리 후배인 신중식 군이 창간을 준비하고 있던 뉴스주간지 〈시사저널〉의 사자(使者)로서 논설위원실로 나를 찾아왔다. 그는 소록도의 슈바이처 신정식 박사와 공화당 항명파 의원이며 건설부 장관을 지낸 신형식 의원의 아우로도 잘 알려졌다. 나는 신중식에게 ‘신포’(‘신 대포’의 줄임말)라는 별칭을 붙였는데 성품이 호방하고 의리 깊고 가끔 얼렁뚱땅할 줄 아는 사나이였다. 한국일보 사쓰마와리 시절에 장 사주가 월급을 적게 주는 것이 화가 나서 화장실 문에 “장 왕초 때려잡아라!” 하고 낙서했다가 적발되어 경을 친 일은 유명하게 알려진 일화다.
신중식은 〈시사저널〉 제작의 총책임을 맡아 달라고 간청했지만 관훈클럽 제35대 총무로 선임되어 1년 임기의 직무를 수행해야 할 처지여서 운신하기 어렵다고 거절했다. 총무직을 마무리할 무렵 신중식 군이 다시 찾아왔다. 부사장을 맡은 박권상 주필도 따로 내 소매를 끌어당겼다. 거듭된 초빙에 응하여 편집주간 겸 상무이사 직을 받아들여 〈시사저널〉에 부임한 것은 1989년 11월이다.
〈시사저널〉 편집국은 각처에서 모여든 젊은 기자들이 날선 창을 꼬나 잡고 조랑말을 타고 달리는 몽골기병처럼 기동했다. 기자들의 개성은 서로 부딪쳐 불꽃을 일으키고, 투혼이 한 솥에서 들끓었다.
제작 총책인 나 자신도 중년기의 근력을 몽땅 쏟아 부으며 새벽 3시 퇴근, 아침 7시 출근을 강행했다. 박권상 부사장 겸 주필은 일 많이 하는 나를 볼 때마다 “안 주간, 기운이 절륜해, 참 절륜해” 하며 혀를 찼다.
〈시사저널〉의 좌표는 시사 정보와 탐사 분석과 정교한 이미지라는 세 변수가 만들어내는 정삼각형의 중심에 놓여야 한다. 그 대신 흥밋거리나 선정, 폭로 요소는 배제해야 한다. 〈시사저널〉의 정체성은 그렇게 설정했다. 우리는 그 정체성을 지키려고 용을 썼다. 특히 시각요소를 각별히 중시하여 미국 시사주간지 유에스뉴스 앤드 월드리포트의 여성 미술부장(아트 디렉터)인 제니스 올슨을 초빙하여 시각요소에 공을 들여 새로운 시사지의 모형을 만들며 부수 14만의 정상을 밟았다.
눈물이 없는 내가 〈시사저널〉에 있을 때 꼭 한 번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는 어떤 느낌으로 인해 남몰래 눈물을 쏟은 적이 있다. 한 해가 저물던 겨울밤에 〈시사저널〉의 몽골기병들이 정동 입구의 단골 경양식집에 집결하여 송년회를 연 날, 모두가 산고의 땀으로 범벅되어 가슴속의 희로애락과 우정을 토해내는 자리였다.

 

최초 호킹 인터뷰

 

1990년 9월 〈시사저널〉은 나의 발의로 우주론자인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석좌교수 스티븐 호킹을 한국에 초청했다. 그 두 달 전인 7월에 나는 〈시사저널〉 최원영 회장이 주선해준 스티븐 호킹의 기고문으로 첫 번째 커버스토리를 제작했다. 그 후 3회에 걸쳐 호킹을 커버스토리로 다뤘는데 미술부장 제니스 올슨과 편집부 기자 김상익이 기획을 주관하도록 지명했다. 올슨은 정교한 스케치로 커버스토리의 미술적 틀을 완성했다. 국문학을 전공하고 음악에 심취한 김상익은 우주론자 호킹을 다루는 데 오히려 감각을 발휘했다.
48세의 우주론자 스티븐 호킹 교수가 휠체어를 타고 김포공항 귀빈실 출구에 모습을 나타내던 9월 8일 밤, 그는 사고하고 상상하는 힘 말고 행동하는 힘을 보여줬다. 손가락 끝 하나로 혼자서 걸어가고(휠체어 조종), 스스로 목소리를 냈다(컴퓨터언어합성기 조종). 여간 강인해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신라호텔 20층 객실에 도착한 호킹 교수는 먼저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본 후 창가로 가서 정지하더니 야경이 펼쳐지는 제3한강교 쪽을 한동안 꼼짝 않고 내려다보았다(외로워 보였다). 이윽고 언어합성기를 조종하여 이렇게 한마디.
“베리 나이스!”
그는 언어합성기를 조작하여 어떤 때는 예리하고 어떤 때는 유머감각이 뛰어난 언어를 구사하지만 어느 경우에건 절제된 내용이었다.

그런데 스티븐 호킹의 인터뷰 담당자로 결정되고 보니 산전수전 다 겪은 나라도 매우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었다.
한국 방문 이틀째인 일요일에 그는 호텔 정원에서 〈시사저널〉 인터뷰에 응하여 내가 질문하는 11개항에 일일이 답했다. 한낮의 더위에 땀을 흘리면서도 그는 꿋꿋한 정신력으로 자기의 다듬은 언어들을 차근차근 만들어냈다. 그중 두 문항만 소개한다.

문 : 생일에 관한 질문을 하겠다. 교수의 생일은 1월 8일이다. 갈릴레오도 같은 날 태어났다(이때 호킹 박사는 키보드를 눌러 즉석에서 ‘아니다’하고 부인했다). 그리고 갈릴레오의 사망일이 뉴턴의 생일과 같다고 들었다. 맞는가? 이는 매우 운명적으로 들리는데(이때 그는 또 한 번 ‘아니다’ 키보드를 눌렀다)….

호킹 박사 : 나는 갈릴레오가 태어난 날짜에 태어나지 않았고, 그가 죽은 날짜에 태어났다. 또 뉴턴은 갈릴레오가 죽은 해에 태어난 것이지, 생일이 같은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뉴턴보다 약 300살 젊다고 말할 수 있다.
문 : 긴 시간 감사하다. 한국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바란다.
호킹 박사 : 땡큐!

[스티븐 호킹 직접 인터뷰. <시사저널> 편집주간 때, 1990년 9월 10일.]

 

편집국 괴담

 

나는 한국일보와 〈시사저널〉에서 개성 있는 후배들을 많이 만났다. 한국일보 수습기자 후배인 김훈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설사 김훈이 현란한 명문으로 《칼의 노래》와 《남한산성》을 써서 낙양의 지가를 올리는 소설가가 되었더라도 나는 일선기자 김훈의 모습을 더 친근하게 여긴다.
그는 한국일보 수습 29기로 13기인 나보다 12년 후배다. 내가 사이공 현장에서 승패를 다툴 때 그는 사회부에서 경찰기자로 뛰고 있었다. 그는 나를 두고 이런 대목을 쓴 적이 있다.

“내가 1973년 말 언론사에 갓 입사한 수습기자였을 때, 안병찬 선배는 산전수전의 현장을 갈고 다니던 고참이었다. 그는 철저한 현장주의 기자였고, 엄혹한 트레이너였다. 우리는 그를 따랐고 두려워했으며 부러워했다.”

김훈은 청개구리처럼 느닷없이 사표도 안 내고 집에 들어앉기를 여러 번 하였다. 그렇지만 내가 그를 〈시사저널〉 편집위원으로 발탁하자 절대로 잔꾀를 부리지 않고 바로 몸을 날려 일선현장을 뛰었다.
김훈은 〈시사저널〉 편집국에 몇 가지 괴담을 남겼다. 그는 완전한 컴맹으로 연필로만 글을 쓴다. 연필로 쓴 원고는 지우개로 고치고 또 고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사를 쓰고 나면 그의 책상 주변은 온통 지우개똥 천지가 된다.

한 번은 내가 편집국 안을 순찰하는데 김훈 사회부장이 책상 밑바닥에 아예 돗자리를 깔고 목침까지 베고 벌렁 드러누워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아크릴 바닥은 김훈이 털어낸 담뱃재로 곰보 자국투성이다. 기강 문란이니 당장 돗자리를 걷어치우지 못할까 엄포를 놓아도 “허리가 아파 앉아서는 일을 못 한다”며 꿈쩍하지 않는다. 두 손을 든 것은 내 쪽이었다.
1996년 내가 〈시사저널〉을 떠나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어 환송회가 열린 자리였다. 그는 연필로 400자 원고지에 꾹꾹 눌러 쓴 환송사 원고를 들고 일어서더니 읽어 내려갔다.

“……오랫동안 저희들의 기자의 선배이자 생업의 선배이신 안 선배님과 함께, 안 선배님 밑에서 지지고 볶고 또 볶고 끌탕에 끌탕을 거듭하며 살아왔던 세월은 언제나 저와 저의 동료들을 눈물겹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끌탕 속에서도 기자의 자세와 정신으로 다시 주변을 가다듬고 일어나서 〈시사저널〉을 떠받치고 나온 세월들에 대해 저희들은 안 선배님과 함께 자부심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김훈의 말을 인용하는 것은 내가 강조하는 저널리즘의 현장주의와 기사 작성에 있어서의 리얼리즘 정신에 그가 동의하고 그것을 직업의 지표로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저널리즘의 토양을 거쳐 소설가가 되었다고 자인한다. 이른바 ‘마초 발언’ 때문에 그가 〈시사저널〉 편집국장직을 내던지고 원점으로 돌아가 한동안 한겨레 경찰기자로 뛴 것은 알려진 얘기다.

 

나의 추적자

 

시사저널〉 시절부터 오늘의 〈시사IN〉 시절까지 나를 추적하며 부려먹거나 먹잇감으로 취재하는 젊은 기자 한 명이 있다. 그 추적자는 친애하는 정치·문화기자 고재열이다. 그는 고집은 가슴속에 묻어두고 수줍은 체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는 친구다.

2003년 2월 어느 날, 〈시사저널〉 편집고문실로 문화부 기자 고재열이 올라왔다. 당시 나는 경원대학교에서 언론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시사저널〉 고문을 겸직하고 있었다. 뛰어난 인터넷 전문기자인 고재열은 인터넷 문화의 ‘성감대’를 주제로 특집을 기획하여 내 글을 받겠다고 한다. 기자 출신 언론학자로서 5060세대를 대표하여 인터넷을 서핑한 후 순행기를 써달라고 강력 주문한다. 나의 인터넷 관전평은 ‘만화경, 혹은 감각의 제국’이라는 제목을 달고 고재열의 특집을 뒷받침했다.
1년이 지난 2004년 2월 어느 날, 고재열이 다시 내 방에 나타났다. 그달에 개봉한 강제규 감독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가 대박을 내고 있을 때다. 내가 6·25전쟁으로 아버지와 영영 생이별한 분단가족인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태극기 휘날리며’의 영화평을 써달라고 취재요청을 한다. 영화는 6·25전쟁 전후의 서울 공간을 실감나게 되살려놓고 있었다. 초여름의 햇볕 아래 전차가 다니는 서울의 거리 정경은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슬픈 공간이었다. 그는 나의 영화평에 ‘가슴 파고든 그 여름 서울 풍경’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고재열은 예민한 시각으로 세상을 쏘아보는 친구다. 명민해서 2007년 〈시사IN〉이 매우 어려워 세 끼니 밥 먹기도 힘들던 때 한국방송(KBS) ‘퀴즈 대한민국’에 나가 장원을 해서 상금 2,000만원을 획득, 화제를 뿌렸다. 그는 그 돈으로 처자를 공양하는 데 썼다고 우스개로 말했다.
그 후 몽골병의 한 명으로 〈시사IN〉 창간에 가담한 고재열은 부업으로 소셜뉴스를 개척하여 강력한 블로그 ‘독설닷컴’의 운영자가 되었다. 지금은 추종자 25만 7,000명을 이끄는 막강의 ‘트위터독설’을 겸영하고 있다. 그는 한국 인터넷 세계에 몇 안 되는 최강자다.

 

몽골기병의 〈시사IN〉 창간

 

2007년 2월 원(原) 〈시사저널〉의 몽골기병 출신 기자들이 단행본 《기자로 산다는 것》을 출판했을 때 나는 그 머리말을 썼다. 제목은 ‘단절된 맥박을 고동치게 하라’였다.
그 책은 정열과 땀과 눈물로 본래의 〈시사저널〉에서 제작에 전념한 경험들을 수록하여 내용이 마치 수호지같이 생생했다.

출판기념회가 열리던 날 나는 모두에 인사말을 했다. 당년 〈시사저널〉의 연륜은 18년인데 내가 재직한 것은 전후반기 통산 10년이다. 나는 〈시사저널〉 기사를 1989년부터 2004년까지 한 호도 거르지 않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한 줄도 빼지 않고 읽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전직과 현직의 몽골기병 기자들 전부의 개성과 기사 솜씨를 훤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시사저널〉의 전반기와 중반기는 대단한 호시절이었으나 경영자가 바뀐 후반기는 몽골병 기자들에게 신고간난으로 점철된 위기의 시기였다.
어느 날 〈시사저널〉 몽골기병 기자들은 옥쇄를 앞두고 노보 홈페이지에 비장한 결의로 23인 전원이 함께 찍은 기념사진 한 장을 올린 후 〈시사저널〉과 결별하고 편집국에서 짐을 뺐다. 참언론실천기자단(sisaj.com)을 구성한 그들은 마침내 원(原) 〈시사저널〉의 언론정신을 계승하되,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시사IN〉을 창간한다고 선포했다. 〈시사IN〉은 사원주+국민주 형태를 사업의 토대로 삼았다. 나는 몽골병 출신들이 창간한 〈시사IN〉의 새 출발을 보며 내일신문 기명 칼럼(2007년 9월 14일자)에 격려사를 썼다.

“〈시사IN〉 오밤중에 발진하다. 〈시사IN〉 만수천산(萬水千山) 고생길을 가는 거다. ‘시사인(人)’, 험산을 넘고 설산을 기고 급류를 건너고 대하를 헤엄쳐, 이윽고 동녘이 튼다. 아침 해가 떠올라도 그 행진을 멈추지 말라.”

 

독설닷컴에 오른 ‘나의 사망기사’
 

2008년 9월 어느 날, 오래간만에 ‘독설닷컴’ 고재열이 전화를 걸어왔다. 이번에는 또 베트남 파병시절을 무대로 한 이준익 감독, 수애 주연의 영화 ‘님은 먼 곳에’를 보러 가자고 졸랐다. 피카디리 극장에서 함께 영화를 보고 난 후 그는 나와 함께 영화를 본 소식을 ‘독설닷컴’에 올렸다.
“얼마 전 안 주간님을 모시고 ‘님은 먼 곳에’를 보고 왔습니다. ‘베트남전 최후 종군기자’는 이 영화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하는 궁금증 때문이었습니다. 보시고 많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이 내용은 ‘독설닷컴 B컷’으로 남아 있는데, 조만간 포스팅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안 주간님을 블로거로 데뷔시켜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블로그도 만들어 드렸습니다.”
이어서 고재열은 내가 쓴 ‘나의 사망기사’도 ‘독설닷컴’(2008년 9월 6일 21:45)에 올렸다.

 

 

“여기 어느 노 기자가 쓴 자기 부고 기사를 한 편 올립니다. 물론 이 기사는 가상 기사입니다. 그는 살아 있는 기자입니다. 이 부고 기사를 읽으며 자신의 죽음마저 기록해 보겠다는 그 불굴의 ‘기록 정신’을 감상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이 부고 기사를 쓰신 분은 안병찬 언론인권센터 이사장입니다. 그 전에는 경원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후학들을 가르치셨고 그 전에는 〈시사저널〉 주간과 고문으로 일하셨고(이때 저와 함께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안 주간님’으로 부릅니다) 그 전에는 한국일보 기자로 일하셨습니다. 우리 업계에서는 ‘베트남전 최후 특파원’으로 유명합니다. 학교에서 스스로 사퇴하신 뒤에 스스로를 ‘르포르타주 저널리스트’로 명명하시고 지금도 취재를 계속 열심히 하시고 계십니다. 요즘도 그는 관훈클럽 3층 기자실에 매일 출근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취재한 기사로 그는 친정인 한국일보에 ‘기분좋은 QX’와 합작한 ‘안병찬의 하이킥 라이프’를 연재하고 계십니다. 안 주간님이 베트남전 특파원으로 가실 때 9년차 기자였습니다(지금 제가 9년차 기자입니다). 안 주간님은 올해로 기자 생활 46년차입니다.
안병찬 주간님의 부고 기사 감상하세요. 이 부고 기사는 안 주간님이 최근 발간하신 《안병찬, 르포르타주 저널리스트의 탐험》(커뮤니케이션북스)의 서문으로 쓰였습니다. 이 부고 기사[나의 사망 기사] 한 편만으로도 그가 어떤 기자인지 잘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사망 기사]

 

제목 : 눈사람 되다

 

역 ‘르포르타주 저널리스트’인 안병찬 언론학 박사가 2008년 10월 4일 생일날 몽골-알타이산맥 최고봉인 몽하이르한울(해발 4,362m) 8부 능선을 넘은 직후 조난하여 불귀의 몸이 되었다.
그의 최후 모습은 극적이었다. 눈사람(雪人)이 되어 서 있었다. 휘몰아치는 풍설 속에 저승사자를 뿌리치며 몽골 안내인을 구하려고 애쓴 듯 그 어깨를 움켜잡은 채 동작을 정지하고 있었다. 표정은 마침내 아늑한 곳에 대피한 양 지극히 평온했다. 그도 죽는가 하여 많은 사람이 무상을 실감했다. 그는 이중 인간이었다. 생전에 딱딱하지만 열린 사람, 도발적이지만 유연한 존재라는 평판을 듣고 싶어 했다.
종말 여정 기록하다
그는 자기 성미대로 종말 여정조차 현장기록으로 남겼다. 취재수첩의 말미는 두 줄의 최후 상황으로 끝난다.
‘아! 몹시 졸리다…… 안내인은 이미 잠들다……. 그 사람 얼굴이 보인다, 사람들이 주마등처럼 흐른다. 오후 6시 12분…….’
이 시대 최초 유일한 르포르타주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어 했던 그는 르포르타주 심포니의 마지막 몇 분을 장중하게 연주하지 못하고 미완성으로 마감했다.
그는 종족의 근원지라는 몽골-알타이산맥과 고비-알타이산맥을 시계방향으로 돌며 큰 원을 그려 보겠다고 했다. 취재수첩에 따르면 그가 악전고투하며 최고봉의 능선을 넘은 것은 생일 하루 전 오후 4시 20분께. 캄캄한 밤이 되자 북방의 깊고 높은 산맥지대에 체감온도 영하 40도의 강풍설이 엄습한다. 그 속에서 그는 시각마다 한 걸음 두 걸음 ‘불귀의 기록’을 남기는 강기(剛氣)를 발휘했다.
어린 시절, 소년 안병찬은 말을 달려 중원의 드넓은 초지를 가로지르는 올곧은 용장 한 사람을 선망했다. 중학교 한문 선생님은 중국 《삼국지》의 ‘장판파’ 전투에서 상산 조자룡이 촉나라 유비의 아들 유선을 갑옷 속에 품고 호왈백만 조조 군단 한가운데를 필마단창으로 짓무찔러 열고 나가는 대목을 구수하게 들려주었다.

 

열사(熱砂)로 날고 싶었다

 

안병찬은 태양이 강렬하게 빛나는 열사로 날아가고 싶어 했다. 영국 감독 데이비드 린이 찍은 ‘아라비아의 로렌스’, 작렬하는 사막을 눈부시게 그려낸 영화의 미학으로 그는 사막이 살아 숨 쉰다고 느꼈다.
청년기에 그는 프랑스 작가 두 사람의 작품에 주목한다.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은 1927년 중국 상하이의 4·12쿠데타를 무대로 하여 혁명이라는 숨 가쁜 현실 속에서 인간의 조건을 발견하는 한 청년의 생생한 체험과 피어린 기록이다. 안병찬은 행동주의 휴머니즘이 발휘하는 능동의 정신이 인간을 불안에서 건져내는 횃불이 됨을 본다.
그는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가 행동을 통한 명상 속에서 시적 언어로 써낸 《인간의 대지》에서 성실한 용기를 읽는다. 생텍쥐페리는 사하라사막에 불시착하여 모래밭 한가운데 큰대 자로 누워 바람과 모래와 별을 극채색으로 그린다. 그는 친구 앙리 기요메가 칠레 우편비행을 감행하다가 안데스산맥 고산에서 조난하여 눈과 얼음, 추위와 절벽 속에서 5일간 사투한 끝에 생환한 극기적인 행동이 얼마나 성실한 것인가 증언한다. 생텍쥐페리는 역경과의 싸움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내고 그 극기적인 행동을 서정적 필치로 묘사해낸 행동적 휴머니즘의 독창적인 르포르타주 작가다.
그는 두 작품을 통해 행동주의 휴머니즘에 근거하여 문학성과 역사성을 지향(指向)하는 르포르타주 형식에 눈떴으나, 그것은 그가 평생에 걸쳐서 붙잡으려 한 사막의 신기루였다.

 

비창(悲愴)의 사실감

 

마침내 그는 26년차 논설기자로 중년기를 맞아 이태(李泰·본명 이우태)의 체험적인 기록문학 《남부군(南部軍)》을 접한다.

《남부군》은 최초로 공개된 지리산 빨치산 수기로서 르포르타주가 어떻게 역사와 만나는지 그 정수를 보여준다. 작가 이태는 기록이란 소재이지 역사 자체는 아니라고 말한다. ‘소재에는 주관이 없다. 소재는 미화될 수도, 비하할 것도 아니다. 의도적으로 분식된 것은 기록이 아니라 창작이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 사실보도를 업으로 하는 기자였다.’
안병찬은 《남부군》 속에서 상상을 넘는 혹독한 조건과 극한의 상황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하는가, 그 비창(悲愴)한 사실감에 가슴이 시렸다고 했다. 《남부군》은 허리가 두 동강이 난 한반도의 한(恨)을 담은 비탄(悲嘆)의 증언록이다. 안병찬은 ‘한국 기록문학의 최고봉’은 《남부군》이라고 믿게 된다.

 

    바람과 별의 카라바니스트

 

안병찬이 무엇 때문에 몽골 말을 타고 고비사막의 드넓은 모래와 초지를 관통하여 만년설이 덮은 고비-알타이 및 몽골-알타이 산맥의 준봉과 폭풍설에 맞서는 최고난도의 고행을 선택했을까.
그는 세 가지 주제, 즉 올곧은 인간의 풍모, 사막과 바람과 별의 서사, 행동주의 휴머니즘의 르포르타주를 알타이 최후 노정에 혼입했다. 짐작컨대 그는 탐험과 고행을 통해 인간의 고향을 찾는 삶의 대장정을 실천하고자 한 것일 테다.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은 그가 ‘기획여행’으로 행로를 잡았을 것이라는 가정에 동의한다. 인간사의 종착역 같은 것은 생각하기 싫다면서 활시위의 팽팽한 긴장을 사뭇 붙잡으려고 한 그, 그러나 최후의 선택은 자기 고집대로 가슴을 펴고 떳떳 당당하게 운명의 끝으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결국, 현장체험을 거쳐 인간사의 의미를 발견하려고 그토록 애쓰던 르포르타주 저널리스트 안병찬은 바람과 별 속에 사막을 횡단하는 카라바니스트가 되어, 장장 3,000리의 알타이 장정에 올라, 자기한테 남은 최후의 에너지를 불사르며 스스로에게 쿠드그라스(coup de grace), 자비로운 최후의 일격을 가한 것이다.”

 

[안병찬-《르포르타주 저널리스트의 탐험》에서, 커뮤니케이션북스 기획, 2008년]
 

 

고재열과 사이공 가다

 

나는 고재열에게 저널리스트의 경험을 가르친 ‘주간님’이다. 그는 그 대가로 나를 블로거로 안내해준 ‘인터넷 선생’이다.
2008년 그는 젊은 감각을 잃지 말라며 ‘기자질 48년’이라고 작명한 블로그(
http://since1962.tistory.com)를 개설해 주었다. 1962년에 한국일보 수습기자로 입사한 이래 저널리스트로 일관하고 있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라고 했다.
나는 매년 베트남에 갈 때는 남부 해방일인 바므이땅뜨(4월 30일)에 일정을 맞추곤 했다. 2010년에는 4월 30일 통일의 날에 맞추어 후배인 〈시사IN〉의 표완수 발행인과 함께 통일열차로 하노이에서 사이공(호찌민 시)까지 1,730km를 1박 2일 동안 달리는 취재여행을 했다. 그보다 20년 전 〈시사저널〉 시절, 나는 표완수 국제부장을 베트남에 특파하여 통일열차를 타게 한 적이 있는데 당시 그는 한국 언론 최초로 생생한 2박 3일의 통일열차 탑승기를 취재하여 커버스토리로 쓴 바 있다.
우리 두 사람은 그 연장으로 ‘사이공 최후의 새벽’ 취재 경험과 ‘통일열차 최초 탑승’ 취재 경험을 융합하는 오디세이를 쓰고 싶었다. 그런데 2012년에는 호찌민 주석이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한 9월 2일에 일정을 맞추고 ‘독설닷컴’ 및 ‘독설트위터’를 운영하는 고재열과 문화기획자 이한호 쥬스컴퍼니 대표를 대동했다.

베트남이 초행인 고재열은 하노이와 호찌민에서 트위터 번개모임을 갖겠다고 나의 동의를 구했다. 우리가 투숙한 하노이의 참빛 그랜드플라자호텔 로비에 모인 베트남 여대생 추종자는 모두 8명. 우리는 그들과 김밥천국으로 옮겨서 라면, 떡볶이, 짜파게티를 나누며 우의를 다졌다.

 

 

 

 

 

 

 

 

사진=호찌민 시(옛 사이공)의 독설닷컴 추종자들은 모두 여대생이다. 필자(가운데)의 오른편이 고재열, 2012년 9월.

 

호찌민의 호텔 콘티넨털사이공 로비에 모인 베트남 여대생 추종자는 20명이었다. 콘티넨털사이공은 역사가 142년 된 동남아 최고(最古)의 프랑스풍 호텔이다. 영국 작가 그레이엄 그린이 저널리스트로서 이 호텔 214호에 장기투숙하여 ‘조용한 미국인’을 집필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호텔의 운치 있는 내정 식당에서 고재열과 함께 아침을 나누고 사이공을 취재하니 아니 즐거울 수 있겠는가.

 

도마의 정신

 

내가 저널리즘 세계에 들어가 첫 번째로 마주친 험로는 사건기자의 가파른 언덕이었다. 사건기자는 ‘직전 과거’를 최단시간에 가장 사실에 가깝게 시뮬레이션으로 재현해야 하는 장애물 경주다. 사실과 사안을 가상적인 모형으로 바꾸는 일은 신기루를 그려내는 일처럼 어렵다.
1980년대 초 어느 날,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서 미국 유학을 마치고 방금 돌아온 이화여자대학교 정치학과 김행자 교수와 마주친 적이 있다. 그녀가 대뜸 던진 첫 질문은 이렇다. “별명이 ‘안깡’이라고요? 정말 죽은 여자 시체의 상처에 손가락을 집어넣어서 재봤다면서요?”
이 얘기는 〈시사저널〉 시절까지 따라왔다.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던 날 편집부장 김상익이 송별사로 써준 글이 있다.
“나는 안병찬 선배에게서 ‘도마의 정신’을 배웠다. 부활한 예수의 옆구리 상처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사실’을 확인한 도마는 종교의 세계에서는 분명 어리석은 자의 표상이지만, 언론의 세계에서는 가장 본받을 만한 기자의 모습이라는 것을….”
김행자와 김상익 두 사람은 호기심과 호감으로 그런 말을 했을 테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찬비가 내리는 으스스한 늦가을 밤에 홀로 병원 시체실에 침투해서 ‘시체실의 멜로디’에 심취하여 황홀한 직업적 오르가슴을 맛본 적은 있지만, 죽은 여자 몸뚱이의 칼 맞은 자리에 직접 손가락을 넣어 본 적은 없다. 이 사례는 시간이 흐르면서 이야기가 전설로 이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어쩌다 생각날 때면 나 홀로 웃곤 한다.

사쓰마와리 후배 채의석은 그의 저서 《현장》 중 ‘빨강 노랑 파랑’이란 글에서 조련사 같은 나의 훈련방법을 묘사했다.
“…흥분을 죽인 A형은 손수 기사를 작성했다. ‘빨강 노랑 파랑 5색 풍선이 하늘을 수놓은….’ 작은 변화였다. 빨강 노랑 파랑 세 낱말의 색감을 선명히 해서 A형은 기자가 칵테일해 놓은 글라스에 빨간 체리 한 알을 살짝 얹어 술맛을 한층 신선하게 돋우어놓은 셈이었다.”
이런저런 소문 때문인지 〈시사저널〉의 문정우(현 〈시사IN〉 대기자)는 내가 한국일보의 체질을 가지고 〈시사저널〉로 옮겨와서 후배 기자들에게 책상머리에만 눌러앉아 있지 말고 현장으로 나가서 뛰라고 끊임없이 닦달을 해댔다고 주장했다.

 

모사(模寫)의 허무

 

돌이켜보면 내가 초기부터 실천하려고 노력한 현장주의 리얼리즘은 당대의 어두운 정치상황 속에서 씨앗이 자란 것이다. 그런데 현장주의 리얼리즘은 나로 하여금 모사(模寫, 시뮬레이션)의 현실적 한계와 허무를 깨닫게 만든다. 과연 우리는 대상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객관주의 기술방법으로 사실의 기반을 다져나갈 수 있는 것인가. 만일 우리가 어느 정도 사실의 축대를 튼튼하게 쌓는 데 성공한다면, 과연 우리는 진실에 접근하는 다음 통로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인가. 이런 의문은 현장주의 리얼리즘의 허무주의적 회의론으로 귀착한다.
한국일보 주필을 지낸 정달영은 현장주의 리얼리즘에서 어떤 근거를 발견하고 회의를 품고 있던 나를 위로하고자 했다. 그는 〈정달영의 기자론 기사론〉에서 “현장이 문체를 만든다”고 다음과 같이 평한 적이 있다.

“‘글이 화려해야’ 기자로서 성공한다는 말은, 적어도 안병찬의 칼칼한 기사 문장을 볼 때면 절반도 못 되는 진실임을 알게 된다. 중요한 것은 관찰력이고, 역사에 대한 시각이며, 거창한 말로 춘추필법 같은 ‘정신’에 있는 것이다.”
정달영은 글이 교과서에 오를 만큼 빼어난 문장을 자랑하는 글쟁이로 나로 하여금 내 글이 절반의 진실도 담지 못한다고 한탄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안이영노와 함께 지은 책

 

〈시사저널〉 실험에 이어 르포르타주 저널리즘을 수행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2005년이다.
2005년부터 르포르타주 저널리스트로서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면서 인간 속으로 들어가 28명의 트렌드 리더를 직접 인터뷰하며 내일신문과 한국일보에 트렌드 특집을 연재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전자에 연재한 기사는 2007년 5월 《삶에 미치는 16가지 기술》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나의 집필 계획을 짜고 출판을 기획한 것은 문화기획가로 트렌드 하우스 ‘기분좋은 QX’을 운영하던 아들 안이영노였다.
한국일보에 기사를 연재하던 2007년 늦봄에는 심장낭염 수술 전야에 병상에서 밤늦도록 최종원고를 다듬고 2008년에 《부자가 함께 지은 책―나에게 반하다》(공저자 안이영노)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는데 편집과 출판을 맡아준 사람은 명편집자인 김상익 군이다.
나는 리얼리즘의 서사를 좇아서 구도자처럼 헤맸다. 저널리스트는 험난한 리얼리즘의 바닥에 몸을 갈아야 하지만, 거기로부터 또다시 자신을 빼내야 하는 가혹한 현장에 산다고 말한다. 나는 그 험난한 여정을 거치며 써나간 현장기록이 때로는 역사보고서나 기록문학서의 가치를 갖게 된다는 희망을 가지고 작업을 계속했다. 그 끝에 내가 기착한 것이 르포르타주 저널리즘이다.
208 | 관훈저널 | 여름호
무릇 영욕이 교차하는 구절양장의 역정을 거치며 저널리스트로 살고 언론학 교수로 장생하는 나를 보고 어떤 후배는 “선배의 ‘다이하드’ 경력은 언론계에 신화는 아니더라도 전설로 남겠다”고 다리를 걸고 들어온 적이 있다.
나는 2008년 1월부터 언론보도의 피해자를 법률적·사회적으로 구조하고 독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사단법인 언론인권센터 이사장직을 맡았다. 저널리즘의 역할이 환경 파수꾼이라면 언론인권센터는 저널리즘 수용자를 구조하는 감시꾼이다. 그래서 새 직책은 아이러니였다. 나는 이사장에 이어 명예이사장으로서 지난 7년 동안 격월간지 《언론인권》과 주관통신을 총감수하여 이끌어왔다.
또 2011년부터는 호찌민(옛 사이공)에서 김종각 변호사가 발간하는 〈교민신문〉을 상임고문으로서 적극 지원하고 있다. 초기 1년 동안 편집과 미술 제작을 집중적으로 감수할 때는 한국일보 견습 후배인 아내 이정자와 함께 호텔에 장기투숙하며 밤새워 도와주었다. 근간에 〈교민신문〉은 베트남 국영통신 외국어 간행물 주관부서와 협약을 체결하여 〈베한타임스〉로 제호를 바꾸어 현지 인쇄를 하고 있다.
나는 경술국치에 항거하여 순국한 애국지사이자 조부인 위당(韋堂) 안숙(安潚)의 절명시 대목 앞에 숙연해진다.

“오호라! 사람의 인생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는데 그 죽음이 진실로 마땅히 죽어야 할 자리에서 죽을 수 있다면 도리어 사는 것보다 옳은 것이니, 이는 서슬이 시퍼런 칼날을 밟고도 제 목숨을 돌보지 않았던 까닭인 것이다.”
그 추상과 같은 기개, 춘추필법 앞에 나는 저널리즘의 역정에서 무엇을 했는지 뒤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교민신문>(현 <베한타임스>) 상임고문, 1911년 11월.]

 

학 외다리로 서다

 

나는 장기영 사주의 한국일보와 특별한 인연을 가진 사람의 하나다.
입사한 지 2년 되던 1964년 설날 연휴, 비번이지만 갈 데도 없고 해서 사회부에 출근하여 무슨 일거리가 터지지 않나 대기하고 있었다. 내 앞의 전화기가 울렸다. 견습 15기로 입사, 소년한국에 배치되어 당직을 서던 홍일점의 이정자가 건 전화였다.
“안병찬 씨, ‘학 외다리로 서다’ 보러 안 갈래요?”
부산 사투리가 섞인 음성으로 연극 관람의 동행을 제안하는 것이다. 여자 친구를 만날 여유가 전혀 없던 사쓰마와리 처지에 거절할 까닭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 두 사람은 명동으로 이동하여 국립극장에서 극단 신협이 공연하는 장막희곡 ‘학 외다리로 서다’를 관람했다. 극작가 하유상이 발표한 토속적인 작품이었다.
우리는 눈 내리는 남산 오솔길이나 분위기가 있는 대학로 학림다방, 인사동 입구의 유일한 찻집인 리리다방에서 시간을 함께했다.
서울에서 시내버스가 총파업하던 날이었다. 그녀는 소년한국 미술대회 진행을 맡아 목포로 출장을 갔다. 경찰 순회야근을 끝낸 나는 그녀를 뒤쫓아서 심야열차를 타고 목포역으로 향했다. 플랫폼에는 목포의 새벽안개가 자욱했고, 그녀가 마중을 나왔다. 우리가 할 일은 역전에서 사이좋게 조반을 사먹고 목포지국장에게 인사한 후 아침열차로 귀환하는 것뿐이었다.
목포지국장은 소년한국 조풍연 주간에게 본사의 사쓰마와리 하나가 여기자를 만나려고 근무지를 이탈하여 목포에 출현했다고 고자질을 했다. 이 일이 알려지자 이원홍 사회부장이 짐짓 짜증내는 표정을 지으며 “안병찬 씨, 경위서 쓰세요!” 했다. 사회부 선배들이 빙글빙글 웃으며 나를 구경하고 있었다. 이원홍 부장은 내 경위서를 책상서랍에 집어던진 후 불문에 부쳤다. 눈칫밥을 먹는 듯 불편한 사내 교제였는데 나중에 들으니 그녀가 이원홍 부장에게 안 아무개는 어떤 사람인가 조회하자 일본말로 “오도꼬노 오도꼬(상남자)”라고 회답하여 나를 지지해 주었다 한다.
우리는 ‘학 외다리로 서다’의 결실로, 문화부의 임영 선배와 고광애 기자 부부에 이어 두 번째 사내결혼을 기록했다. 그녀의 장점 중 하나는 시어머니와 20년 이상 함께 살며 친구처럼 지냈다는 것이다. 이정자는 결혼하는 바람에 한국일보를 떠나게 되었다고 가끔 불평한다.

 

[필자 후기]
필자는 한국일보에 실린 처녀기사(‘1962년 3월 6일자 초등학교 입학식 소묘였다’)를 시작으로 지난주 문화미디어 ‘기분좋은 QX통신’에 올린 글 (중용하면 재앙도 권피아도 없다)까지 52년간 작성한 모든 기사와 칼럼, 시론과 사설, 자료와 원고 등을 스크랩으로 분류, 보관하고 있다. 또 취재 중에 직접 찍은 사진과 슬라이드, 그 밖에 타자기와 카메라, 보도증과 보도완장 등 취재용품 일체를 보관하고 있다. 그중에는 사이공을 탈출할 때 무개 지프를 내버리면서 가져온 자동차 열쇠도 있다. 이런 자료들이 본고를 쓰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관훈저널> 2014년 여름 통권 131호 미니회고 기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