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르포르타주 저널리즘

우리는 왜 통일열차를 탔는가

 

우리는 왜 통일열차

 

 

를 탔는가

 

 

2012년 4월-베트남 통일 37주년에

 

 

 

후배 표완수와 동행한 까닭

 

리는 삶의 길에서 때로 특별한 사람과 조우한다. 나는 언론의 길을 걸어오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 가운데 아주 각별한 짝이 있다. 뉴스주간지 「시사IN」의 표완수 발행인이다. 나는 「한국일보」수습기자 출신이요 그는 「경향신문」수습기자 출신인데 우리는 1989년에 원(原)「시사저널」에 모여 동반자가 되었다. 여기서 원(原)「시사저널」이라고 말하는 것은 「시사IN」의 구성원이 떨어져 나온 후 남아있는 현(現)「시사저널」과 구별 짓기 위함이다.

표완수 발행인은 해직기자로서 옥고를 겪은 민주언론인이다. 그는 성실한 저널리스트 생활을 거쳐서 탁월한 언론경영인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있다. 그는 와이티엔(YTN)의 대표이사가 되자 적자를 면치 못하던 회사를 흑자로 바꾸어 놓았을 뿐 아니라 숙원사업이던 자회사를 3개나 설립하고 자본금을 저축했다. 와이티엔에서 경영을 잘한 예를 한 가지 들면 퇴락한 남산의 서울타워를 대대적으로 개축 쇄신하여 부활시킨 일이다. 그 뿐 아니다. 적자회사이던 「시사IN」도 흑자회사로 만들었다. 2009년 1월에 「시사IN」대표이사 겸 발행인으로 부임한 그는 2010년에 3700만원의 흑자를 내더니 2011년에는 6억 원의 흑자를 달성하여 회사 경영전반을 안정기조로 바꾸었다.

그렇다 치더라도 무엇보다도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의 사람됨이 진국이기 때문이다.

2년 전인 2010년 4월 말의 일이다.

나는 표완수와 동행하여 통일 35주년을 맞은 베트남으로 가는 기회를 잡았다. 우리 두 사람의 가슴을 참으로 두근거리게 만드는 공조 취재여행이었다. 이번 여행은 그 보다 20년 전인 1990년의 여행과 연결되어있었다. 당시 원(原)「시사저널」편집국장이던 나는 표완수 국제부장을 베트남에 특파하여 통일열차에 탑승하게 했다. 나는 사이공 체제가 붕괴하고 베트남이 통일을 이루는 날 새벽까지 현장을 취재 한 끝에 ‘통일열차’라는 주제에 집착하게 되었는데 표완수는 이 테마를 이어간 나의 대리인이자 동반자였다.

 

지도=베트남 통일열차 경로(시사IN 제공)

 

 

첫 기사, ‘통일열차의 기적소리’

 

증기기관차 하나가 한국의 비무장지대 장단(長湍)역 터에서 심하게 녹슬어갔다. 개성을 향해 달리다가 멈춘 그 기관차는 오래 동안 무성한 잡목에 싸여 한국전쟁의 상흔과 반세기가 넘는 무상한 세월을 알려주었다. 우리는 그 기관차가 이렇게 기적을 울리고 싶어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 베트남 민족도 1954년부터 1975년까지 21년 동안 국토가 분단되어 있는 동안 우리와 똑같이 허리에 아픔을 느꼈을 터이다. 1976년 베트남의 ‘뗏(구정)’은 1월31일이었다. 그 전해 4월30일에 사이공이 소멸했으니 그로부터 만 9개월 하루를 넘긴 날이었다. 사이공 패망의 현장을 체험한 기억들도 차츰 과거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어 다소 따분함을 느끼던 때이기도 했다. 편집국 외신부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나의 귀에 갑자기 멀리서 기적소리가 들려왔다. 외신이 베트남에서 남북을 잇는 통일열차를 개통했다는 소식을 타전하던 순간의 느낌이 그랬다.

사이공정권을 소멸시킨 통일을 달성한 베트남정권은 남북통일 급행열차를 운행하기 위해 남북 간선철도의 복구 작업을 부랴부랴 서둘렀다. 베트남정권은 엿가락처럼 휘고 엿 조각처럼 끊어진 남북철도에 인력을 개미떼 같이 동원했다. 그리하여 1976년 뗏에 맞추어 베트남 철마는 기적을 울리며 남북을 처음으로 종단한 것이었다.

그날 나는 「한국일보」 지면에 ‘베트남을 달린 첫 통일열차’라는 제목의 기사를 써서 올렸다. 이 기사는 내가 베트남 통일열차를 좇는 실마리가 되었다.

 

1990년-표완수의 통일열차 2박3일

 

그로부터 14년이 흘렀다. 1989년 4월 말, 「한국일보」 논설위원이던 나는 일부러 베트남 통일의 날에 맞추어서 14년 만에 다시 호찌민 시를 취재할 기회를 얻었다. 그때 내가 베트남 최고의 작곡가 찐꽁선을 수소문해 만나 본 것도 통일열차의 꿈을 노래한 그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도이머이 쇄신정책을 펴서 빈곤과의 투쟁을 벌이기 시작한 베트남 땅에서 통일열차를 꼭 타보리라고 벼르다가 통제의 분위기 때문에 아쉬움만 남긴 채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그 꿈은 1990년 섣달에 이루어졌다. 당시 원(原)「시사저널」은 정통 시사지라는 대명사를 내걸고 스스로 새 시대의 정신과 체제(포맷)를 표방하면서 창간한지 1년이 되던 때였다. 제작 총책임을 맡고 있던 나는 오래도록 호시탐탐 기다리던 베트남 통일열차 취재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나는 베트남에 특파할 기자는 표완수 국제부장이 적격이라고 생각하여 그를 지명했다. 표완수는 멀리 방콕을 거쳐서 호찌민으로 들어간 다음 통일열차를 타고 2박3일간 하노이로 북행하면서 취재하는 험한 임무를 빈틈없이 수행했다. 그가 돌아와서 써낸 생생한 표지기사 제목은 ‘한국기자 첫 탐승기, 사이공-하노이 통일열차 2박3일’이다.

표완수는 10쪽에 걸친 커버스토리(「시사저널」 제63호, 1991년 1월10일자)의 전문을 이렇게 시작했다.

“베트남 최대의 도시 호치민시(구 사이공)에서 수도 하노이까지 베트남의 남북 종단 특급 통일열차를 타면 2박3일, 꼬박 48시간이 걸린다. 1730km, 서울-부산 거리의 4배이다. 기자는 12월7일 오후 2시5분 통일열차를 타고 사이공역을 출발, 12월9일 오후 2시5분에 정확하게 하노이역에 도착했다…….”

그때 표완수 부장이 통일 급행열차 취재의 꿈을 이루어준 것을 나는 대견하고 자랑스럽게 여겼다.

 

2010년-35년 시공 넘어 동반 취재 1박2일

 

다시 20년이 흘러갔다. 이번에는 내가 표완수 「시사IN」 발행인과 함께 하노이에서 통일열차를 타고 통일의 날인 4월30일에 맞추어 ‘사이공’으로 간다. 우리 두 사람은 ‘사이공 최후의 새벽’ 취재 경험과 ‘통일열차 최초 탑승.’ 취재 경험을 연결하는 오디세이를 쓰고 싶었다. 표완수 발행인은 오래간 만에 뜻있는 현장 취재를 맡게 되자 흥분하는 눈치였다. 회사 경영업무는 잠시 제쳐두고 출장취재 준비에 열중했다. 우선 편집지원팀 담당자를 대동하고 전자상가로 달려 나가더니 기능 좋은 휴대용 노트북 한 대를 구입했다. 다음에는 사진부 기자를 불러서 촬영한 사진을 어떻게 전송하는지 열심히 배웠다.

나는 참으로 오래간 만에 「시사IN」 편집국 회의실로 가서 커버스토리 구성회의를 주재했다. 참석자는 표완수 발행인, 남문희 편집국장, 양한모 미술팀장, 이등세 편집팀장, 안희태 사진부 기자 등으로 대부분이 원(原)「시사IN」 출신이었다. 표완수 발행인이 20년 전에 커버스토리를 쓸 때 남문희 편집국장은 국제부의 초년 기자였다. 양한모 미술팀장은 당시에도 통일열차 미술 구성을 맡았으니 원(原)「시사저널」의 맥박이 그대로 이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노이행 아시아나 733편을 타자 표완수 발행인은 마음이 더 설렌다고 말한다. 나 역시 출동의 흥분을 느낀다. 하노이 대우호텔에 여장을 푸니 집에서 이메일이 한 통 왔다.

“두 신사가 더위 때문에 멋을 제대로 부리지는 못하겠지만 마음이나 임무는 근사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림이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발신인은 나의 동거인이다. 전직이 「한국일보」 동업자인 그녀는 이른바 직접독자 (가장 가까이서 기사를 접하는 독자)로서 20년 전에 표완수 국제부장이 쓴 베트남 통일열차 첫 탑승기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던 터라 인사 편지를 보낸 것이다.  

 

20년 만의 ‘드엉삿 통녓’ 오디세이

 

뒤에 표완수 기자는 통일열차를 취재하는 감회를 이렇게 썼다.

“20년 만의 베트남 통일열차 탑승 취재였다. 1990년 12월에는 나 혼자였으나, 지금은 당시 편집국장이던 안병찬 선배(언론학 박사. 전 한국일보 ‘사이공의 최후’ 특파원·전 「시사저널」 발행인 겸 편집인. 현 언론인권센터 이사장)와 동행이다. 당초에는 국제팀 신호철 기자와 안 선배가 함께 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취재 계획이 안 선배의 저녁식사 자리에서 바뀐다. 무심코 던진 그의 말에 부인 이정자 씨(여성정치포럼 대표)가 특유의 족집게를 들이댄 것이다.

‘절대 표완수 씨가 가야지요. 20년 전에 표완수 씨가 통일열차 타지 않았나요?’

안 선배는 저녁밥을 입에 문 채로 나에게 전화했다. 70대 베테랑 대기자와 60대 어정쩡한 기자의 ‘베트남 통일열차 기행’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그는 이번 통일열차 취재는 베트남 통일 35주년을 맞아 분단 한국의 나이 든 언론인 둘이 취재에 나섰다는 의미도 있지만, 옛날의 편집국장과 국제부장이 공조 취재한다는 점도 두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고 기술했다.

“특히 나로서는 20년 전, 당시 2박3일간 호찌민에서 하노이까지 여행하며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도민투안 부부를 직접 찾아 나선다는 점 때문에 더욱 가슴 뛰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2010년 5월8일자 「시사IN」 제68호 커버스토리 대제목은 ‘베트남 통일 35주년 기념 하노이~호찌민 종단 통일열차 ‘오디세이’)

 

‘4월30일’의 뿌리

 

그해 하노이 길거리는 남부해방 35주년과 5월1일 메이데이를 묶어서 경축하는 현수막과 간판으로 장식되었다. 베트남은 ‘바므이탕뜨’ 곧 4월30일을 ‘남부해방일’ 혹은 ‘남부전복일’로 부른다. 2010년은 하노이 정도(定都) 10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했다.

베트남은 중국과 1000년을 싸웠다. 1975년에 4·30 항미전승을 거둔데 앞서 1954년에는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 원정군을 무조건 항복시켜 5·7 항불전승을 달성했다. 베트남이 항불전쟁과 항미 전쟁을 차례로 치르며 통일을 달성하는 데 걸린 시간은 117년이다.

호찌민의 영묘가 있는 이 위대한 도시는 여전히 콧대가 높다. 하지만 이 도시는 내면으로는 고민이 매우 깊었다. 실리경제를 추구하랴, 드높은 혁명의 자존심을 견지하랴, 두 마리 토끼를 좇으며 내부적으로 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하노이에는 살아서 전설이 된 보응웬잡 장군이 있다. 프랑스 원정군을 무조건 항복시킨 디엔비엔푸 승전의 전략가 잡 장군은 나이 100살(올해 102살)이었다.

 

수정전략 ‘확고한 공격, 확고한 전진’

 

나는 잡 장군이 쓴 회고록 「디엔비엔푸-역사와의 동반」(2004년) 영문판을 읽은 일이 있다. 번역한 사람은 미국 여류 작가 래디 보튼인데 그녀는 ‘세계를 바꾼 결정’이라고 제목을 단 기고문(「베트남타임스」 2009년 4월25일자)에서 베트남군이 당초에 디엔비엔푸 총공격 일자를 1954년 1월 말로 잡았다가 왜 3월13일로 연기했는지, 여러 추적 조사 자료를 제시해서 밝히고 있다. 

베트남군은 당초 ‘신속한 타격, 신속한 승리’를 전략으로 짰다고 한다. 그런데 기습타격 예정일을 11일 남겨놓고 호찌민 대통령은 “승리를 확신할 때만 싸우라. 승리가 확실치 않으면 싸우지 말라”고 명령한다. 잡 장군은 기습의 선봉대인 제308 ‘강철사단’을 라오스 국경 쪽으로 철수시키는 결정을 내린다. 장군의 새로운 전략은 ‘신속한 타격, 신속한 승리’에서 ‘확고한 공격, 확고한 전진’으로 바뀐다. 그리하여 3월13일 오후 5시를 기해 개시된 ‘확고한 공격, 확고한 전진’의 디엔비엔푸 공략전은 55일간 밤낮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5월7일 프랑스 원정군 사령관 나바르 장군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끝났다.

베트남이 초강대국인 미국을 패퇴시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디엔비엔프의 승리는 항미전승으로 이어진다. 일찍이 잡 장군은 “4·30 항불전승은 5·7 항불전승에서 움텄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취재원 찾는 방법  

 

표완수 기자는 하노이 대우호텔에 들어서면서 시설과 분위기가 세계 어느 곳에 있는 일류 호텔에 비해도 손색이 없다는 데 놀란다. 호텔방에 들어서면서 우선 인터넷 선부터 확인한다. 노트북을 꺼내 직접 연결한다.

“안 선배도 기사 송고, 특히 사진 송고 때문에 신경이 많이 쓰이는지 직접 체크하면서 자신의 이메일 박스도 열어본다. 그러더니 ‘야, 서울보다 더 빠르다! 그의 기분 좋은 일성이다.”

표완수는 줄 곳 20년 전과 오늘을 비교하며 취재해 나간다. 달라진 사람들 표정, 베트남 사회 변동 그리고 베트남 통일열차 등 20년 동안 변하지 않은 것과 변한 것을 찾아 기사에 담으려고 노력한다.

그는 맨 먼저 20년 전에 사이공-하노이 통일열차에 동승했던 도민투안 부부를 찾는데 집중한다. 나는 그가 왕년의 야성으로 돌아가 사람을 탐문하는 민첩하고 집요한 모습을 보고 내심으로 웃으며 그 결과가 어떨지 구경만 했다.

그는 미리 인터넷을 뒤져서 도안투안이 영화감독이라는 사실을 알고 왔다. 하노이에 도착하던 날 밤 공항에 마중 나온 한국잡지 「윈도 베트남」의 유명호 발행인에게 투안을 수소문해달라고 부탁했으나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호텔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던 중 젊은 여성 지배인이 눈에 띄자 벌떡 일어나서 그녀에게 다가가더니 영화감독 도미투안을 찾아 달라고 집요하게 매달렸다. 그것이 효과를 발휘했다. 그날 낮 지배인에게 투안을 찾아냈다는 연락이 왔다. 마침내 도안투안은 약속한 대로 오후 4시에 자동차를 몰고 대우호텔로 와서 표완수 기자와 나를 태워 자기 집으로 안내했다. 20년 만에 반갑게 해후하는 장면을 사진에 담는 것은 나의 몫이 되었다.  

 

사라진 분단 17°선

 

베트남철도공사는 하노이-호찌민선에 ‘드엉삿 통녓(통일열차)’을 운행한다.

4월27일 낮 12시25분. 하노이 기차역에서 통일열차를 타고 사이공역으로 향한다. 통일 후 사이공은 호찌민 시로 이름을 바꿨으나 역 이름은 지금도 공식적으로 사이공 역이다. 통일열차는 출발역, 정차역, 운행시간 등에 따라 모두 10종(SE1~SE8과 TN1, TN2)으로 구분된다. 하노이 역 출발~사이공 역 도착 편은 홀수 번호(SE1, SE3 등), 사이공 역 출발~하노이 역 도착 편은 짝수 번호(SE2, SE4 등)이다. SE3 편과 SE4 편이 가장 빨라 29시간30분 걸리고, 우리가 탄 SE5는 31시간35분, SE6는 31시간40분 걸리는 것으로 시간표에 나와 있다. 가장 오래 걸리는 TN2는 41시간25분이 소요된다. 20년 전 꼬박 48시간 걸렸던 데 비하면 많이 단축되었다. 2박3일이 1박2일로 줄어든 셈이다.

통일급행 SE5의 특등 객실 11호에 몸을 싣고 1박2일을 가는 동안 병약한 베트남 노부부에게 아래 칸 침대를 내주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나는 동호이와 후에 사이에 나오는 동하를 사진에 담고 싶었으나 정차역이 아닌데다가 통과시간이 캄캄한 자정께여서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회상의 시간은 1972년 봄으로 돌아간다. 하노이군은 파리평화협상 타결을 앞두고 군사분계선인 17°선에서 춘계 총공세를 취했다. 당시 사이공 주재 특파원으로 근무하던 나는 최전선에 뛰어들기로 결심하고 홀로 사이공을 떠나서 1100km를 북상하여 4월5일 꽝찌에 도달했다. 인적이 완전히 끊긴 1번 국도를 따라 최전선인 동하 시내로 들어가던 길이었다. 초토화한 동하 시내가 저 앞에 보이고 포성이 귀를 찢는데, 베트남 삿갓을 쓴 농부 한 사람이 길가의 논을 묵묵히 갈고 있는 것이 아닌가. 농부는 최전선의 한가운데 서 곡식을 일구고 있었다. 그것은 기나긴 전쟁을 거치며 살아온 베트남 농부의 모습이었다.

그날 나는 최대의 위기를 넘겼다. 남군 중위의 지프차에 편승해서 마침내 17°선의 동하강 최일선에 진입해서 사진을 찍으려던 찰나, 매복했던 북군 게릴라의 B40 견착용 로켓포의 저격을 받았다. 위기일발, 포탄은 15m 전방에서 작렬하고 우리는 지프차로 줄행랑을 쳐서 꽝찌로 돌아갔다. 바로 이런 사연이 있는 베트남 분단선이다. 그러나 그 분단선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서 없었다. 

 

35년 시공 넘어 ‘사이공 해방’ 1700km

 

표완수는 객실 내 정경을 묘사했다.

“열차가 탄호아를 지나자 연도 양편으로 끝없이 논이 펼쳐진다. 땅콩밭이 자주 눈에 띄고, 물소처럼 뿔이 길게 난 소들이 들판에 많이 보인다.

오후 6시가 지나면서 해가 어스름해진다. 맞은편 자리의 노인 두 분이 자리에 눕는다. 내 윗자리의 젊은 엄마 짱(27)도 어린 딸 짜미(3)를 데리고 누웠는지 조용하다. 안 선배가 노인들의 윗자리, 그러니까 짱의 맞은편 2층 자리로 올라간다. 사다리가 있는 것도 아닌데 날렵한 몸놀림이다. 복도 문 양옆 벽 중간 높이쯤에 손바닥 절반만한 쇠판이 붙어 있는데, 평소에는 덮어뒀다가 위에 올라갈 때 그것을 열어젖힌 뒤 밟고 올라간다. 내가 한마디 던진다.

‘안 선배, 타잔놀이 잘하시네요. 막 날아다니시는 게 대단하십니다!’ 안 선배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과 환한 웃음이 동시에 퍼진다…….”

베트남의 메콩강은 언제나 같았다. 짙푸른 삼림과 굽이굽이 흐르는 메콩강은 한결같았다.

인간은 어떤가. 베트남에서 분단과 전쟁과 통일, 또 도이머이(쇄신)의 길을 저 메콩강처럼 굽이굽이 살아온 인간의 모습은 어떤가.

2010년 4월28일 저녁 8시40분, 통일열차는 사이공 역에 도착했다. 표완수 기자는 기술한다.

“오랜 시간 우리의 룸메이트로 마음의 대화를 나누었던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은 비엔호아 역에서 내렸다. 그 두 분과 악수를 나누면서 우리는 이상하게도 무엇인지 서로 통하고 있다는 것을 강하게 느꼈다. 열차는 놓친 시간을 만회하지 못하고 모두 40분 정도 연착하여 사이공 역에 도착한다. 왁자지껄한 사이공 역 앞에 ‘베사모’(베트남을 사랑하는 사람들) 회원들이 모임의 중심인물인 ‘안병찬 특파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카페 지브랄

 

호찌민에서 우리는 중심지 람손 광장에 있는 콘티넨탈호텔에 투숙했다. 프랑스 양식의 호텔로 2010년 현재 131년 된 최고(最古)의 호텔이다. 그 건너편에 미국 에이피통신사가 들어 있던 에덴 빌딩이 있다. 에덴 빌딩 모퉁이에 람손 광장을 바라보는 카페 지브랄이 있다. 콘티넨탈 호텔과 카페 지브랄은 각각 식민지 시절과 전쟁 시절에 저널리스트들의 집합소였다. 그 카페 지브랄도 50년 된 에덴 빌딩이 호찌민 시 인민위원회의 재개발 계획에 따라 강제철거를 당하면서 문을 닫았다. 거리와 건물마다 베트남 금성홍기와 “불멸의 전승일 4월30일과 5월1일 국제노동절 정신을 기린다”고 쓴 현수막이 걸렸다.

4월30일 오전 7시, 통일궁(전 독립궁)에서 당과 정부의 고위 지도자, 국제 귀빈, 그리고 전국 각계 대표 5만 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행사가 열리고 군인과 예술가의 행진이 이어졌다. 밤에는 시내 5개 지점에서 불꽃놀이가 하늘을 장식했다. 이렇게 우리 두 사람의 통일열차 공조취재는 막을 내렸다.

나에게 이 취재의 길은 35년 시공 넘어 ‘사이공 해방' 1700km를 달린 여정이었다. 표완수에게 이 취재여행은 20년 만에 다시 탄 베트남 통일열차 ‘오디세이’였다.

 

통일 베트남에서 배운다

 

지금 베트남은 4·30 항미전승과 5·7 항불전승의 정신을 근간으로 삼아 정경분리의 이름 아래 개방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4월30일 열린 통일 베트남 경축행사는 혁명 2세대와 3세대가 주관하는 의례적 행사라고 볼 수 있다.

베트남의 전후 세대는 그런 혁명 세대와 다른 새로운 정치 문화 속에 성장하면서 때로는 갈등 요소를 잉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속에서 전후 세대는 혼란을 느끼고 반역하며 신자본주의 체제로 말미암아 통속화하고 있다

우리가 베트남에서 배울 점은 불퇴전의 자주정신이다. 특히 우리는 베트남의 통일운동에서 배워야 할 점이 많다. 한국과 베트남의 분단과 통일의 조건은 다른 점도 있고 동일한 점도 있다. 베트남은 대륙 중국에 1000년 간 맞서며 독립을 지켜냈고 유럽 강대국 프랑스에는 100년을 저항한 끝에 무조건 항복을 받아냈다. 더구나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을 상대해서는 20년 전쟁을 벌여서 끝내 패퇴시켰다. 그 강인한 저력으로 베트남은 스스로 통일을 쟁취했다.

나는 베트남이 세계 최강 국가인 중국과 미국을 상대로 펼치고 있는 외교 전략에 주목한다. 국경을 맞댄 중국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근공원교(近攻遠交)의 방책을 쓰고 있다. 미국에 대해서는 종속(從屬) 관계가 아니라 대등(對等)한 눈높이로 현실적인 전략을 구사한다.

많은 한국인들은 오직 경제적인 잣대 하나로 베트남을 평가하려든다. 그들은 속물적인 우월감을 들어낼 뿐이지 베트남의 자존을 보지 못한다. 최근 베트남 달랏대학에서 한국학과 교수로 재직하는 유태현 전 베트남 대사는 내가 관여하는 주간 베트남 <교민신문>에 이런 글을 썼다.

“우리가 베트남에 우월감을 가질 근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는 베트남 국민은 물질적인 풍요보다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여 국가와 개인의 최고 가치인 독립과 자유를 국가 이념으로 설정한 품위있는 국민이라고 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다. 그렇기에 베트남은 남북종단 통일열차를 운행하게 되었다고 믿는다.

                               

[<관훈저널> 2012년 봄 통권 122호 기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