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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태양의 후예> 내가 홀린 전말”

 

 

                                                       

 

[세평 소묘]

 

“<태양의 후예>

               

                내가 홀린 전

 

  15회와 최종회를 보고 또 보니

 

 

        김포국제 공항 1975년 5월13일-소묘  안병찬

 

모연 : “근데 이 배는 왜 이러고 있어요?”

유시진 : 홀려서. 아름다운 것에 홀리면 이렇게 되죠.

강모연 : 홀려본 적 있어요?

유시진 : 있지요.……알텐데.

 

강모연(송혜교)이 모래톱 위에 올라앉은 녹슨 폐선의 아름다움에 홀려서 유시진(송중기)과 나누는 대화다.

지난 425일인가우연히 <태양의 후예>를 종방하고 편성한 특집 편을 보다가 이내 유시진과 강모인에게 홀려버렸다. 나는 월요일부터 일요일에 걸친 일주일 간 매일 밤을 지새우며 <태양의 후예>3편씩 몰아서 보아나갔는데, 특히 15회와 종편인 16회는 각각 네 번씩 보고 또 보았다.

두 사람은 16회를 이어가면서 시종일관 아주 절제된 자세를 지탱하며 절실한 두 마음을 정점으로 이끌어 나간다. 둘은 밀어(蜜語)를 적당히, 대충 나누는 것이 아니고, 어투는 꽤 무뚝뚝하지만 매무새도 단정하게 흐트러짐이 없이 서로 그리움을 주고받는 모양새다. 유시진과 강모인을 보면서 나는 가슴이 설레었고 나의 청춘을 그리워했다.

나는 이때까지 방송 신파극을 한 번도 본적이 없다. 이 멜로드라마가 아무리 거국적 관심을 모았다 하더라도 내가 이토록 심히 홀려버린 것이 스스로 이상했다. 이 멜로드라마의 무엇이 나로 하여금 정신없이 몰입하게 만들었을까?

                   

             <태양의 후예> 한 장면                       

 

모래와 바람 그리고 별

 

이 드라마에는 바람과 모래와 별의 서사가 섞여있다. 나는 젊은 시절 저널리즘에 편입한 후 앙투안 생텍쥐페리에게서 행동주의 휴머니즘이 발휘하는 능동의 정신이 인간을 불안에서 건져내는 횃불이 됨을 배웠다. 생텍쥐페리는 행동을 통해 명상하며 시적 언어로 써낸 인간의 대지에서, 그가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하여 모래밭 한 가운데 큰 대자로 누워 쏟아져 내리는 별을 올려다보는 체험을 극채색으로 그려낸다. 유시진과 강모인이 폐선의 난간에 나란히 앉아서 밤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별을 쳐다보는 서정적 장면은 생텍쥐페리의 인간의 대지를 연상시킨다.

이 드라마의 또 다른 힘은 특전사 장교인 유시진이 빈번하게 홀연히 왔다가 홀연히 사라져 위험지대 최전선(最前線)으로 가는데 있다. 이별은 그리움을 유발한다. 짐작하건데 나는 부지불식간에 기억의 자기중심적 작용으로 선택적 지각을 하여 내 경험의 밑바닥에 가닿았을 터이다.

 

선택적 지각

 

나는 전문직업인 저널리즘이 명하는데 따라 최전선(最前線)에 빈번하게 특파되어 홀연히 떠나 있기를 반복했다. 나는 한국일보에서 1970년대 어간에 도합 15회의 특파 경험을 쌓으며 비용을 가장 많이 쓴 기자로 지냈다.

19724월 북베트남군의 총공세 때, 베트남 분단선인 북위 17도선 상의 동하 최전선에 단신 뛰어들어 불타는 동하교를 촬영하려던 순간, 베트남민족해방전선 저격수의 휴대용 비-40로켓포로 조준 사격을 받아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번한 한 일은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로켓포는 10미터 거리에서 작열했고 나는 정신이 혼미하여 안내하던 남베트남군 제20전차부대 판 탄 통 중위와 지프차 뒷바퀴 밑으로 다투어 머리부터 들이미는 작태를 연출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18일 뒤 한국군 맹호부대가 북베트남 강습부대에게 빼앗겼던 638고지를 재탈환한 직후 구급 헬리콥터를 타고 종군했을 때도 혹여 수풀 속에서 난데없이 북베트남군의 자동소총의 저격을 받을세라 등골이 서늘했다.

 

1982년 11월 중동 베이루트에 특파됐을 때는 단신으로 시리아군과 팔레스타인인민해방전선(PFLP) 및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거점인 베카계곡까지 89킬로미터를 돌파했는데, 통과한 각종 검문소는 모두 29개소에 달했다. 레바논 정부군 검문소 3, 팔랑헤 우익민병대 검문소 1, 이스라엘군 검문소 2, 시리아군 검문소 19, 팔레스타인 해방군 및 이란혁명수비대(파스다란) 합동검문소 1, 레바논 및 시리아군 합동검눈소 3 개소가 그것이다. 당시에도  베카 거점의 분위기는 공포탄 소리가 콩볶듯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살벌하기 짝이 없어 자칫하면 낭패할까봐 모골이 송연했다.

 

2대 생이별의 위기감

 

끝으로 베트남의 통일결정전 때 사이공의 패망을 현장 취재한 과거사이다. 나는 1975323일 한국일보 기동특파원으로 사이공에 부임하여 430일 새벽 410분 사이공을 공중탈출하기까지 38일간 온몸으로 절대위기상황과 맞섰다. 북베트남군은 압도적인 힘으로 남베트남 영토를 북에서 남으로, 서에서 동으로 가르며 빠르게 진격해 왔다. 멸망의 초침은 분과 초를 가르며 시시각각 나를 압박해왔다.

우리가족은 6·25전쟁 때 아버지와 영영 생이별을 한 이산가족이다. 나는 사이공 멸망의 초침소리 속에서 문득 문득 내가 대를 이어 가족과 생이별을 하는 상황을 맞을지 몰라 불안과 공포감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도무지 도망칠 생각은 안 났다. 그런 힘은 저널리즘의 직업적 욕망에 근원이 있었다.

 

내가 사이공-남중국해-필리핀의 수빅기지-괌섬의 타무닝 난민수용소를 거쳐 51일 만에 김포국제공항에 귀환한 때는 1975년 5월 13일 오후, 나를 마중 나온 동료와 친지의 인파에 싸였던 그녀가 나에게 뛰쳐나와 우리는 서로 안았다. 그 장면은 사진부 박태홍 기자의 카메라에 순간 포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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