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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찬 르포르타주 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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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향 : 역사와 문학의 저널리즘 탐험
by 안병찬

'칼럼'에 해당되는 글 24건

  1. 2017.11.02
    편집국 괴담 (1)
  2. 2017.11.01
    나의 추적자 ‘고재열’
  3. 2017.09.13
    '강철 무지개' 시퍼런 칼날 밟고 서다
  4. 2017.05.15
    왜 '문재인 개혁'을 미국 일에 비유하는가 (1)
  5. 2016.10.15
    메아리 30년-농부와 형사와 나 (2)
  6. 2016.10.02
    재록-구원의 정화
  7. 2016.10.02
    ‘백면서생’ 단련기(鍛鍊記)
  8. 2016.10.01
    내가 만난 사람-김영미 피디 4
  9. 2016.09.15
    탈오리엔탈리즘이 필요한 이유
  10. 2016.09.15
    광야 울리는 절명시(絶命詩)들

 

 

사진=시사IN 제공

 

편집국 괴담

 

 

나는 〈한국일보〉와 〈시사저널〉에서 개성 있는 후배들을 여럿 만났다한국일보 수습기자 후배인 김훈 작가는 그 가운데 유별난  한 사람이다. 설사 그가 현란한 명문으로 《칼의 노래》와 《남한산성》을 써서 낙양의 지가를 올리는 큰 작가가 되었더라도 나는 일선기자 김훈의 모습을 더 친근하게 여긴다.

 

몸 날려 현장 돌진

 

그는 〈한국일보〉 수습기자 29기 출신으로 13기인 나보다 12년 후배다. 내가 사이공 현장에서 승패를 다툴 때 그는 사회부에서  초년 경찰기자로 뛰고 있었다. 그는 나를 두고 이런 대목을 쓴 적이 있다.

“내가 1973년 말 언론사에 갓 입사한 수습기자였을 때, 안병찬 선배는 산전수전의 현장을 갈고 다니던 고참이었다. 그는 철저한 현장주의 기자였고, 엄혹한 트레이너였다. 우리는 그를 따랐고 두려워했으며 부러워했다.

김훈은 청개구리처럼 사표도 안 내고 느닷없이 집에 들어앉기를 여러 번 하였다. 그렇지만 내가 그를 〈시사저널〉 편집위원으로 발탁하자 그는 결코 잔꾀를 부리거나 핑계를 대는 일 없이 즉각 몸을 날려 일선현장으로 뛰었다.

김훈 기자는 원 〈시사저널〉 편집국에 몇 가지 괴담을 남겼다. 그는 스스로 완전한 ‘컴맹’을 고집하고 연필로만 글을 썼다. 연필로 원고를 쓰면 지우개로 고치고 또 고쳐 명문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사를 쓰고 나면 그의 책상 주변은 온통 지우개똥 투성이가 된다.

 

돗자리 깔고 누워 편집국 근무

 

한 번은 내가 편집국 안을 순찰하는데 김훈 사회부장이 책상 밑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목침까지 베고 벌렁 드러누워서 담배를 피고 있다. 아크릴 바닥은 그가 털어낸 담뱃재로 곰보자국투성이다.

내가 편집국 기강 문란이니 당장 돗자리를 걷어치우지 못할까, 하고 엄포를 놓아도 “허리가 아파 앉아서는 일을 못 합니다”하고 꿈쩍도 하지 않는다두 손을 든 것은 편집국장인 내 쪽이었다.

나는 후임 편집국장인 김훈이 연필로 400자 원고지에 꾹꾹 눌러 쓴 환송사를 잊지 못한다. 1996년 내가 원 〈시사저널〉을 떠나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어 환송회가 열린 자리였다. 그는 연필  원고를 들고 일어서더니 읽어 내려갔다.

 

연필로 꾹꾹 눌러 쓴 환송사

 

“……오랫동안 저희들의 기자의 선배이자 생업의 선배이신 안 선배님과 함께, 안 선배님 밑에서 지지고 볶고 또 볶고 끌탕에 끌탕을 거듭하며 살아왔던 세월은 언제나 저와 저의 동료들을 눈물겹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끌탕 속에서도 기자의 자세와 정신으로 다시 주변을 가다듬고 일어나서 〈시사저널〉을 떠받치고 나온 세월들에 대해 저희들은 안 선배님과 함께 자부심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김훈 국장의 말을 인용하는 것은 내가 강조하는 저널리즘의 현장주의와 기사 작성에 있어서의 리얼리즘 정신에 그가 동의하고 그것을 직업의 지표로 인정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초 파동

 

그는 저널리즘의 토양을 거쳐 소설가가 되었다고 자인한다. 이른바 '마초 발언’ 때문에 그가 원 〈시사저널〉 편집국장직을 내던지고 원점으로 돌아갔을 때, 그는 백의종군하며 망설임 없이 이른바  '사쓰마와리(察廻)'(경찰기자)의 길을 선택했다. 그리하여 〈한겨레〉 소속으로 한동안 '사쓰마와리'로 뛴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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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학 산공 2017.11.05 05:09 address edit/delete reply

    현장 주의자, 안깡 님, 후배들에게 훌륭한 자세를 보여 주었습니다.




 

 

 

나의 추적자 ‘고재열’

 

원(原) 〈시사저널〉시절부터 〈시사IN〉시절에 걸쳐 나를 추적하며 먹잇감으로 취재하거나 부려먹은 젊은 기자 한 명이 있다. 그 추적자는 정치·문화기자 고재열이다.

그는 고집은 가슴속에 감추고 겉은 수줍은 체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는 친구다. 또 예민한 시각으로 세상을 쏘아보는 친구다.

20032월 어느 날, 〈시사저널〉 편집고문실로 문화부 기자 고재열이 올라왔다. 당시 나는 경원대학교에서 언론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시사저널〉 고문을 겸직하고 있었다.

 

인터넷 성감대 

 

뛰어난 인터넷 전문기자인 고재열은 인터넷 문화의 ‘성감대’를 주제로 특집을 기획하고 내 글을 받아 싣겠다고 한다. 기자 출신의 언론학자로서 50․60세대를 대표하여 인터넷을 서핑한 후에 그 순행기(巡行記)를 써달라고 강력 하게 주문한다. 그의 강청에 마지못해 내가 써낸 인터넷 관전평은 『만화경, 혹은 감각의 제국』이라는 제목을 달고 고재열의 특집을 뒷받침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20042월 어느 날, 고재열이 다시 내 방에 나타났다. 그달에 개봉한 강제규 감독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가 대박을 내고 있을 때다. 내가 6·25전쟁으로 아버지와 영영 생이별한 분단가족인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태극기 휘날리며’의 영화평을 써달라고 주문한다.

 

태극기 휘날리며

 

‘태극기 휘날리며’는 6·25전쟁 전후의 서울 공간을 실감나게 되살려놓고 있었다. 초여름의 햇볕 아래 전차가 다니는 서울의 거리 정경은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슬픈 공간이었다. 그는 나의 영화평에 『가슴 파고든 그 여름 서울 풍경』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는 명민했다. 2007년 〈시사IN〉 초기에 경영이 매우 어려워 세 끼니 밥 먹을 임금도 받기 힘들던 시절이었다. 그는 한국방송(KBS)의 생방송 ‘퀴즈 대한민국’에 나가더니 장원을 해서 상금 2,000만원을 획득하여 화제를 뿌렸다. 그 돈으로 그는 배곺은 처자를 공양하는 데 썼다고 우스개로 말했다.

 

세력가 독설닷컴

 

고재열 기자는 ‘몽골기병’(내가 원 시사저널 기자들에게 붙인 별칭)의 한 명으로 〈시사IN〉 창간에 가담했다. 고재열은 부업으로 소셜뉴스를 개척하여 강력한 블로그 ‘독설닷컴’의 운영자가 되었다. 당시 추종자 257,000명을 이끄는 막강의 ‘트위터독설’도  겸영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 인터넷 세계에 몇 안 되는 최강자였다.

 

'since1962.tistory.com' 내력

 

그는 나에게 블로그 'since1962.tistory.com'를 작명하고 구축해 주었다. 1962년부터 〈한국일보〉에서 기자직을 개시했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그덕에 나는 일찌감치 블로그의 선진으로 행세를 할 수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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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 울리는

이육사와 안숙의 절명시

 

‘강철의 무지개’처럼

시퍼런 ‘칼날’을 밟고 서다

 

김영삼 문민정부가 들어선 시절 서울대학교 언론학부에 출강할 때의 일화이다. 나는 강의 첫 머리에 수강생 중 한 사람을 불러내 시(詩)를 낭송하도록 한다. 이육사의 절명시(絶命詩) ‘광야(曠野)’가 그 하나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하여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여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에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신세대 피 끓게 하는 저항의 노래들

 

젊은이들에게 이 시를 읽은 소감을 물으면 입을 모아 “피가 끓는다”고 대답한다.

이육사의 이 웅혼(雄渾)한 시는 우주의 탄생과 가난한 현재의 삶과 초인을 목 놓아 부를 천고의 미래를 담아냈으니 감동하지 않을 신세대는 없다. 일제의 감옥을 17번이나 드나든 민족저항시인 이육사.

‘강철로 된 무지개’를 노래한 그의 시 ‘절정(絶頂)’ 또한 절창(絶唱)이다.

‘강철로 된 무지개’를 노래한 그의 시 ‘절정(絶頂)’ 또한 절창(絶唱)이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 진 그 우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육사는 유교적 선비정신으로 직설적인 저항시를 노래했다는 평을 듣는다.

이와 함께 역시 조선 선비정신으로 순절(殉節) 보국한 위당 안숙(安潚)의 애국 ‘절명시(絶命詩)’를 낭송토록 한다.

  오호라! 사람의 태어남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는데

  그 죽음이

  진실로 마땅히 죽어야 할 자리에서 죽을 수  있다면  

  그 죽음은

  도리어 사는 것보다 현명한 것이니

  이는 서슬이 시퍼런 칼날을 밟고서도

  자신의 목숨을

  돌아보지 않았던 이유인 것이다

 

위 구절은 대한제국 말 충절의 선비 위당(韋堂) 안숙(安潚)이 지은 절명시의 서두로서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는 위당의 묘비명으로 새겨졌다.

 

하늘을 찌르는 격문(檄文)

 

위당은 왜적이 대한제국을 침탈한 1910년 경술국치에 통분하여 자결 보국한 나의 할아버지이다. 젊은이들은 이 절명시 역시 비장하면서도 추상같은 기개가 하늘을 찌르는 격문이어서 가슴을 울린다고 말한다.

그런데 유독 사회학과 남학생 한명이 반기를 들었다. 운동권에 속한 그는 “양반계급은 지배계급이자 기득권세력이다”라고 흑백논리를 폈다. 그 학생은 선비와 양반을 구분하지 않고 날을 세운 것이었다.

양반은 고려와 조선 시대에 국왕을 중심으로 동쪽에 문반(文班)이 서고 서쪽에 무반(武班) 서서 두 반열을 만든 데서 비롯했다. 지배계급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문관 관료를 총칭하는 사대부(士大夫)라는 명칭도 붙었다. 양반은 배타적인 특권을 향유했으며 군역(軍役)을 면제받고 노비를 마음대로 부리며 기득권을 누렸다.

그렇지만 선비는 유교이념을 구현하는 인격체이자 신분계층으로서 양반과 엄격히 구분한다. ‘선비정신’이라는 말은 명분과 의리를 대쪽처럼 밝히고 대의를 세워 덕치를 실현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시종무관장과 대신(大臣)을 역임한 충정공 민영환(閔泳煥)은 1905년(광무 9년)에 “대한제국 2천만 동포에게 죽음을 고하노라(警告大韓二千萬同胞遺書)”하는 절명시를 쓰고 자결했으니 역시 만고의 의인이거늘, 한 젊은 사회학도의 좁은 시야는 그만큼 여물지 못했다.

마침 <조선의 지식계보학>(옥당)이 나왔다. 저자인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최연식 교수(동아시아고전연구소 소장 겸임)는 정치 동학적 시각으로 역사에 접근하여 ‘지식권력의 시대’를 풀어낸다. 그는 조선의 역사는 권력 암투의 역사로서 국가가 힘의 논리에 따라 지식인을 공인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고 보았다. 구체적으로 조선의 지식인 15명을 문묘에 종사하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고 그 일이 조선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설명하고 있어 흥미롭다.

<조선의 지식계보학>을 보고 절명시들을 다시 꺼내 읽는다.

목숨을 걸고 애국하는 것은 의(義)로운 일이다.

정정당당한 애국은 자존과 자주를 수호하는 존엄한 가치로 일

컬어진다.

 

[20015. 03. 05 아시아엔 발행 '안병찬 코멘터리' 원고 부분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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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5.18 유족을 위로하는 문제인 대통령

문화일보 2017년 5월 18일자 1면 보도

 

 

 

문제인 대통령 개혁

 

왜 미국을 준거로 삼는가

 

 

한국에 사는 일부 방송 토론자와 일부 지식인에게 묻는다.

문제인 대통령의 개혁 행보를 말하면서 걸핏하면 미국의 사례를 준거로 삼아 인용하고 비유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지난 5월 14일 일요일 오후 어느 종편 방송에 토론자로 나온 모 정치 평론가도 미국의 오바마를 어들여 비교하면서 잘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또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가 한복이 아닌 양장을 한 모습을 가리켜 '영부인 상을 깨는 행보' 운운 하며 미국의 미셀 오바마를 끌어다 대는 토론자도 있다. 심지어 미국의 공화당 대통령 후보 였던 밥 돌까지 비교 대상으로 등장하는 판이다.

이땅의 지식인과 권력자와 기득권 세력 가운데 많은 사람이, 걸핏하면 미국의 온갖 사례를 모범으로 꼽으며 한국 사례와 비유하기를 습관화 하고 있다.

극복하고 바로잡아야 할 행태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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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황범 2017.08.21 01:13 address edit/delete reply

    안 선생님! '문제인 -> 문재인' 오타가 있어 말씀드립니다.




[취재기] 40+사진들

 

메아리 30

 

농부와 형사와 나

 

 

 

간에 전직 수사 형사인 이노성 씨(현 한국일반행정사협회 연수원 강사)가 오래간 만에 전화를 걸어왔다. 강원도 평창군 대화면 상안미리에 사는 농부 심순수 씨 네가 손수 재배한 블루베리 한 상자를 나에게 보내드리려 하니 주소를 알려달라는 전갈이다. 이틀 후 블루베리 한 상자가 집으로 배달되었다. 상표는 무농약 친환경 과일 평창불루베리’, 주소는 대화면 금당계곡로 1191-1, 대표 이름은 심상익이다.

형사 이노성 씨와 대화고추 농부 심순수 씨, 그리고 언론인인 필자가 삼각의 인연을 맺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데는 각별한 사연이 있다.

 

 

사진=블루베리 과수원에서 찍은 농부 심순수 씨(78) 일가. 앞줄 왼쪽부터 손자 문섭과 손녀 유진. 뒷줄 왼쪽부터 심순수 씨부인 홍천란 씨, 심순수 씨, 며느리 및 아들 심상익 씨.

 

 

 

논설위원, 차령산맥 눈 속을 가다

 

내 눈에는 30년 전인 1987년의 정월 초이튿날 설경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그날 오대산 일대에는 눈이 펑펑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한국일보 논설위원이던 나는 강원도의 그 깊은 눈길을 헤치며 평창군 대화면 상안미리3구 두메산골에 사는 대화고추 농부 심순수 씨를 찾아가고 있었다. 마침 새해 연휴여서 아내를 동반했다. 정강이까지 빠지는 눈길이었으나, 쏟아져 내리는 눈이 멀리 차령산맥 일대를 뽀얗게 가려 아늑하고 포근한 눈세계를 만들었다.

30년 전 내가 눈 속을 뚫고 찾아 갔을 때 심신수 씨 아들 상익은 13살이었다. 블루벨리는 북미 토착 열매로 진달래 목에 속하는데, 이제는 대화 산골 농가에서도 재배하게 되었다. 지금 40대 중반이 된 심상익 씨는 5년 전부터 불루베리를 직접 재배하고 있다. 본래 이 고장 대화는 고추의 산지로 대화 고추는 지금도 알아주는 특산품이다.

당초에 내가 대화농부 심순수 씨를 손수 취재하게 된 동기는 작은 사회면 기사에 있었다.

 

발단이 된 표주박기사

 

19861225일 크리스마스 날 한국일보 사회면 표주박란에 짤막한 사건기사가 한 토막 실렸다. ‘4백만 원어치 사기당하고 밭 천 평 팔아 빚 청산이라는 제목이 붙어있었다.

 

표주박

서울 서초경찰서는 24일 가난한 농부를 속여 고추 2,047근을 가로챈 김 모 씨(42, , 사기 등 전과 3, 서울 마포구 동교동 113)를 사기혐의로 구속했다. 경찰에 의하면 김 씨는 지난 929일 강원도 평창군 대화면 시장에 고추를 팔러 나온 이 동네 심순수 씨(46, 농업)에 접근, “고추 값을 후하게 줄 테니 이 동네 고추를 모아 서울에 내다 팔자고 제의, 조 모씨 명의로 5백만 원이 입금된 가짜 예금통장을 건네준 뒤, 심 씨와 함께 고추를 싣고 서울로 올라 왔다는 것. 김 씨는 심 씨를 농협영등포지점으로 데리고 가 예금청구서를 써 놓았으니 방송이 나오면 통장을 갖고 창구로 가서 돈을 찾으라고 말한 뒤 사라진 후 고추를 모래내시장에 대다 팔아 450만원을 가로챈 혐의다.”

 

논설위원으로 고정칼럼 메아리를 집필하던 필자는 이 표주박 기사를 읽고 현장취재를 하면 좋겠다고 판단했다. 곧장 서초경찰서를 찾아가 담당자인 수사과 이노성 형사를 만나면서 현장 취재를 시작했다.

그리하여 필자는 메아리 3연작으로 대화고추와 첫눈’(198716일자)-‘대화고추와 형사’(18일자)-‘메밀꽃 통곡하다’(124일자)를 집필하게 된다.

다음은 본고 초두에 언급한 것처럼 1987년 정초에 눈길을 뚫고 강원도 산간으로 심순수 씨를 찾아 가 만나는 내용을 담은 첫 번째 메아리이다.

 

대화고추와 첫눈’-첫 번째 메아리

 

1987년 초하룻날 자정께부터 서울에 내린 눈은 초이튿날 아침부터 비로 바뀌고 비에 녹은 눈이 빙판을 만들었다. 필자는 한국일보 논설위원으로서 정초 연휴를 틈타 아내를 동반하고 소형 엑셀 승용차를 운전하여 대화농부 심순수 씨 네를 찾아 나섰다. 서울은 눈비가 내렸지만 강원도 태백산맥에는 소담한 눈송이가 펑펑 쏟아졌다.

해발 1,563 미터의 오대산에서 분기한 차령산맥 옷자락에 들어 있는 산간 부락들에는 한 자를 넘는 눈이 폭신하게 쌓이고, 그 위에 다시 눈이 내려덮였다. 높고 험한 산이 연봉을 이루었으나 소리 없이 펑펑 쏟아지는 눈발이 보얗게 가리어 그 설경이 그지없이 아늑하다.

강원도 평창군 대화면 상안미리3구는 갈미봉 밑에 있는 해발 600미터의 산간 부락이다. 그런데 내가 몰던 엑셀 승용차는 대화 면소재지에 이르러 빙판에 미끄러지면서 한 바퀴 회전하더니 돌 축대를 정면으로 하고 들이받았다. 나는 아내가 충격을 받지 않도록 오른 손으로 제어하다가 승용차가 충돌하는 순간 운전석에서 몸이 튀어 올라 두피가 벗겨지는 상처를 입었다.

하는 수 없이 전면이 망가진 승용차를 길가에 세워두고 택시를 부르기로 했다. 당시 대화면에는 택시가 12대 있었는데 그 중 한 대를 잡고 운전사에게 부탁하여 상안미리 농부 심순수 씨 집을 찾아 나섰다. 강원도 택시는 바퀴에 체인을 칭칭 감고 남한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평창강 상류의 안미천에 걸린 콘크리트 다리를 건넜다. 그곳에서 반 마장쯤 더 나가면 심순수 씨 농가가 있다지만 강원도 택시는 더 이상 산간 눈길을 전진하지 못한다.

우리 부부는 정강이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걸어서 언덕을 넘었다. 산허리를 돌아 동구에 이르자 개울가에서 눈발 속에 빨래하는 아낙네를 만났다. 그에게 물어서 마침내 심순수 씨 네가 두 번째 농가라는 것을 알았다.

가난한 농부 심순수 씨는 산비탈에서 1년 내내 땀 흘리며 지은 대화고추를 서울사기에 걸려 몽땅 잃은 사람이어서 대화면 일대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심순수 씨의 농가는 옥수수 대로 담을 쳐 놓았는데 헛간은 텅 비어있었다. 그는 어두운 방바닥에 13살의 아들과 16살의 딸과 함께 쭈구려 앉아서 늦은 점심으로 꽁보리밥을 들고 있었다. 반찬은 무청시래기 한 가지였다. 부인은 답답한 마음을 달래러 아랫마을 조카 집에 가고 없었다.

심순수 씨는 정초에 내리는 이 함박눈이 상서롭기를 간절하게 소망하고 있었다. 84일 만에 범인이 잡혀 경찰이 2047근 중 1200근을 장물로 압류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직후였기 때문이다.

그는 서초동에 사는 정찬오 교감선생님 사모님인 조명운을 사칭한 40대 서울여자의 말에 걸려들어 대화고추 한 트럭분을 사기 당한 처지였다. 자기가 수확한 것 뿐 아니라 처분을 위임받은 이웃들의 몫까지 합쳐 모두 2047근을 몽땅 잃어버렸다. 그 것은 100근 짜리 부대 20여개로 4톤 복서 트럭 한 차분량이다. 그리하여 심순수 씨는 남의 집 고추 값 397만원을 변상하느라고 전 재산인 조상답 1000평을 농협에 저당 잡힌 후 절망의 나락에 떨어졌었다.” (한국일보 메아리, 198716일자)

 

대화고추와 형사’-두 번째 메아리

 

순박한 농부를 개미에 비유한다면 닳아빠진 서울사람은 베짱이가 될 것이다. 대화농부 심순수 씨의 처지는 눈 속에 버려진 한 마리 개미의 신세와 같았다. 개미가 1년 내내 경작한 대화고추를 서울 베짱이가 교활한 속임수로 몽땅 훔쳐간 것이었다.

그런데 심순수 씨는 정초에 내리는 함박눈이 상서롭기를 간절하게 소망하고 있었다.

심순수 씨가 서초동 삼익아파트에 사는 정찬오 교감님 사모님 조명운을 자칭한 40대 서울여자에게 홀려 이웃 농가들의 고추를 모 2047근을 모은 것은 추석이 지나고 두 번째로 대화장이 선 날이었다.

그리하여 그가 교감 사모님을 쫓아 4톤짜리 고추 트럭을 타고 생전 처음 서울에 도착한 것이 이튿날(929). 교감 사모님은 심순수 씨 손에 조명운이름의 농협온라인통장(예금액은 전무했다)을 쥐어주고 길성여관에서 하룻밤을 재웠다. 여자가 농협영등포지점에 심순수 씨를 버리고 대화고추 한 트럭분과 함께 자취를 감춘 것은 그 다음날 낮.

서울 서초경찰서 이노성 형사는 그날 당직 근무 중이었다. 이노성 형사가 교활한 서울 베짱이를 기어이 잡아보리라고 결심한 것은 단순히 형사 근성 하나 때문만은 아니었다. 서초동 밤길을 정신없이 헤매다 서초경찰서에 이끌려온 강원도 산골농부를 보자 농촌출신인 그는 가슴이 저렸다. 그는 평창군 하면 한국 제일의 오지이며, 벽지라고 생각했다. 농부 심순수 씨 부부가 다 같이 마흔 여섯 해를 살면서 서울구경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으니 그곳은 벽촌이었다.

어떻게 가슴이 아팠던지 관할서로 이첩하지 못했습니다. 내 손으로 기어코 잡아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산골농부 모습이 매일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이노성 형사의 수시동기에 과장이 없다는 점은 관할책임이 없는 사건을 그가 스스로 떠맡은 것만 봐도 납득이 간다.

이노성 형사는 서울의 경동시장, 모래내시장, 서부역 일대의 고추판매상을 돌며 묻고 또 물었다. 마침내 이 형사는 경동시장의 어느 고추도매상에게 용의자와 인상착의가 흡사한 여자가 북가좌동에 산다는 제보를 받았다. 그러나 북가좌동의 고추아줌마 김 여사는 동교동으로 이사하고 없었다.

동교동 동사무소로 가서 세대별로 주민등록카드를 확인해 나가던 이 형사는 마침내 용의자인 김 여사의 얼굴을 찾아냈다. 이노성 형사의 연락을 받고 서울에 온 심순수 씨는 김 여사’(46)의 사진을 확인하자 아이구하며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노성 형사가 주소지를 여덟 번 지킨 끝에 김 여사를 잡은 것은 1223일 밤, 사건이 난지 84일 만이었다. 3남매의 학비와 1000만 원의 빚에 쪼들린 김 여사는 대화고추 장날을 노려 베짱이의 속임수를 부렸다고 한다. 범인을 잡고 장물로 압류한 분량은 2047근 중 1200근이었다.

 

서초서에 빗발친 전화세례

 

서초경찰서와 담당 이노성 형사는 한국일보의 메아리 대화고추와 형사를 읽은 독자들과 시민들에게서 빗발치는 전화의 세례를 받았다.

광화문에 산다는 신사는 오늘 아침 한국일보를 보니 통쾌한 마음을 금할 길 없더라고 했다. 서초동에 산다는 주부는 이노성 형사의 목소리를 한 번 들어봤으면 좋겠다. 3시간에 걸쳐 다이얼을 돌렸는데 계속 통화중이지만 하나도 짜증이 안 났다고 했다.

서초경찰서 관내 디스코 클럽 경영자는 이노성 형사가 그동안 고생을 하셨으니 실컷 드실 만큼 고기를 준비하겠다. 꼭 나와 달라고 청했다. 동대문구 상봉동에 산다는 학생은 세상에 그런 형사가 있었나. 한국일보에서 조작한 것이 아닌가, 믿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런 전화가 100통이 넘었다.” (한국일보 메아리, 198718일자)

 

책상을 치니 하며 죽더라

 

그러나, 서초경찰서 이노성 형사의 인간적인 봉사가 빛을 발할 때, 공안 정국의 일대 시국사건이 발생한다.

114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과대표 박종철 군(1964년 생)이 고문사를 당한 것이다. 박종철 군은 113일 자정께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로 불법 연행되어 혹독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으로 목숨을 잃었다.

116, 당시 치안본부장 강민창은 기자회견을 통해 저 악명 높은 궤변으로 책상을치니 갑자기하며 죽더라하고 공식 발표했다. 쇼크사가 고문사로 확인된 것은 사망 검진의사인 중앙대병원 내과 오연상 전문의 덕이었다. 그는 청년은 이미 숨져 있었는데 복부 팽만이 심했고, 폐에서는 수포 음이 들렸다고 언론에 밝혔다. 그 해 6월 항쟁이 일어났고 대통령 직선제가 성취되었다.

 

메밀꽃 통곡한다’-세 번째 메아리

 

극도로 대조되는 두 가지 경찰상이다. 젊은 대학생이 하루아침에 목숨을 잃고두 벌 주검’(부검)이 되어 한 줌의 재로 변해 임진강에 뿌려지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허무를 느낄 뿐이다. 가혹행위를 일삼는 경찰 탓으로 사람들은 공분(公憤)을 넘어 허무를 느낄 따름이다.

그 젊은 대학생이 대공분실 취조실에서 변사한 사실을 치안본부가 처음 발표한 것은 115일이다. 수사관이 주먹으로 책상을하고 치자 대학생은소리와 함께 쓰러졌다는 것이 그때 치안본부가 밝힌 거짓진상이었다.

같은 날 강원도 평창군 대화농협 사무실은 온기가 감돌았다. 농부 심순수 씨는 마을 유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농협 강원도 지회장이 춘천에서 먼 길을 찾아와 윤근환 농협 회장의 이름으로 심순수 씨에게 불우농민 돕기 성금 1백만 원을 전달하는 자리였다.

그 현장에 나가 지켜본 작가 최기인 씨(새농민 잡지 기획역) 인정의 메밀꽃이라는 표현을 썼다. 강원도 평창군은 작가 이효석의 단편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이다. 바로 대화면 북쪽에 메밀꽃 필 무렵의 현장인 봉편면이 있다. 장돌림인 허생원 일행이 봉편장을 거치고 한 여름 달밤에 나귀를 몰고 하얗게 메밀꽃이 핀 산길을 따라 가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한 여름 밤의 메밀꽃 대신 한 자가 넘게 눈이 쌓인 한겨울에 대화 산간마을에서 절망에 빠져 있던 농부를 구출한 것은 형사 한 사람의 인간적 봉사, 그리고 젊은 형사반장의 이해심 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

치안본부 취조실에서 고문으로 죽은 젊은 대학생의 입관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아버지는 몇 십번이나 땅을 치며 통곡하고 어머니는 까무러쳤다. 대학생의 주검이 장의차에 실려 백제화장장으로 옮겨져 한줌의 재가 되고 강물에 뿌려진 날은 116일이다.

그날 서울지검 동부지청 231호 김병환 검사는 농부 심순수 씨가 변제받는 방법을 찾기 위해 대화 고추사건 관련자를 한자리에 불렀다. 참석자는 사기피의 자인 김 여사, 장물취득자인 고추 판매상 김 씨, 피해자인 농부 심순수 씨 내외, 담당형사 이노성 순경이었다. 이 자리에서 장물취득자인 김 씨는 남은 고추 1200 근과 현금 100만 원을 농부 심순수 씨에게 변제하고, 피의자 김 여사는 외상 미수금 300만 원을 받아 고추상 김 씨에게 주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젊은 검사도 체류비와 차비를 농부 심순수 씨에게 내주며 위로했고, 고추를 일부분 되찾은 심순수 씨는 근당 1600 원 씩에 팔아 190만 원을 건졌다.

우리는 할 바를 다하는 형사의 봉사에서 하얗게 만개하는 메밀꽃 같은 인정의 꽃을 본다. 반대로 고문을 일삼는 대공수사단 남영분실 형사의 몸에서 사신(死神)의 냄새를 맡는다.

당신들은 서초경찰서와 이노성 형사에게 빗발치듯 전화의 세례를 보낸 시민에게 무엇이라고 말 할 텐가. '인정의 메밀꽃'을 꽃피운 형사가 부끄러워 통곡하지 않겠는가.

하얗게 핀 메밀꽃이 온통 통곡을 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한국일보 메아리, 1987120일자)

 

사진=평찬블루베리를 상자에 담는 부인 홍천란 씨

 

이듬해 198811일과 설날에 필자는 이노성 형사와 농부 심순수 씨 부인 홍천란 여사의 안부전화를 받았다. 1989년 정초에도 두 사람은 새해 인사 전화를 걸어왔다. 정초마다 필자가 생각난다고 말하니 언제고 또 안부 전화가 올 것이다. 이노성 형사는 19991월에 경사로 승진했고, 퇴임한 후 행정사로 활동하고 있다.

심순수 씨 아들 심상익 씨는 2010년에 블루베리 800그루를 심고 시설재배(비닐하우스)를 하여 1년에 1톤을 생산한다. 짧은 기간 작업하여 얻는 소득이 2000만원 정도이니 사간 농가로는 괜찮은 사업이라고 말한다.

심순수 씨의 주소인 대화면 상안미리3구는 새도로명 대화면 미달길 153으로 바뀌었다.

  

언론인 안병찬(언론인권센터 명예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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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상하 2016.10.31 14:15 address edit/delete reply

    강민창 차 를 96년 내 동생이 교통사고 냈지요 동생차가 강민창 차를 박았죠
    강민창이 추석때 고향 안동 올때 문경에서 ㅠㅠ
    ᆢ 작년 내동생은 사는게 힘들어 목을메고 저하늘 로 떠났습니다 ᆢ
    강민창 치안본부장 이름 들으니 내동생의 슬픈 일이 생각납니다ㅠ

  2. 오늘도 누군가를 위하여 2017.03.29 07:43 address edit/delete reply

    멋진 메아리 감동입니다
    행정사로서도 낮은곳에 많은 희망을 나눠주시길...




2016.10.02 20:46

 

 

 

구원의 정화(情火)

[2009년 1월 2일 21:27 등재 칼럼]

년 만에 대학에 출강했다. 근자에 신세대의 생각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궁금해서였다. 교정을 드나들며 신세대의 정서를 느끼는 대신 훈계와 잔소리로 그들을 쥐어박다보니 어느 새 한 학기가 훌쩍 지나갔다.

 

 

사진=꽃의 2중창

 

 

 

최근에 나는 프랑스 작곡가 레오 들리브의 오페라 라크메에 나오는 꽃의 이중창필이 꽂혔다.’ 인터넷에 들어가 찾아낸 꽃의 이중창은 여성 고음(소프라노)과 차고음(메조소프라노)의 두 가수가 호흡과 음량의 조화를 이루며 부르는 높은 음 자리의 노래다. 여성의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그 드높고 아름다운 화음이야말로 천상의 노래가 아니고 무엇이던가.

과시 남성에게 여성의 초상은 구원의 미(美)라는 진리를 새삼 깨닫게 만들었다. 그처럼 ‘꽃의 이중창’은 나의 마음을 관통하여 나를 취하게 했다.
대학생들에게 이 노래를 들려주면 그들도 뜻이 통해 나와 같은 감정을 가질 것인지 알고 싶었다.

늙은 여성의 황홀한 이중창

내가 수강생들에게 들려준 ‘꽃의 이중창’은 호주의 소프라노 조안 서더랜드와 미국의 메조소프라노 마릴린 혼이 부른 것이다. 한국의 홍혜경과 미국의 제니퍼 라모어가 함께 부른 것도 있으나, 연륜이 깃든 앞의 두 가수의 노래가 화음의 깊이를 더 한다고 느껴서 그것을 선택했다.

신세대는 음이 강렬하고 박자가 급한 댄스곡이나 랩 음악에 익숙한 터지만, 나이 먹은 두 소프라노 가수의 치솟아 오르는 이중창이 영사막 동영상으로 강의실 안에 울려 퍼지자 모두 귀를 쫑긋 모으며 선율 속으로 빨려드는 모양이었다.

나는 이 노래 외에도 서양 고전음악 중에서 여성과 남성의 감정을 실은 노래를 더 들려주었다. 그리스 출신의 나나 무스쿠리가 부르는 마르티니 작곡 ‘사랑의 기쁨’과 세 남성 테너가 부르는 베르디의 아리아 ‘여자의 마음’이다. 남녀의 정서를 담지 않은 곡으로는 당대 최고의 샹송가수 밀레이유 마티유가 힘차게 혀끝을 차며 부르는 혁명 행진곡이자 프랑스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가 있다.

신세대들은 내가 소개한 노래들을 흥미롭게 경청했다. 피아노를 공부한 한 법학과 남학생은 ‘꽃의 이중창’은 곡의 화음으로 인해 절정을 느끼게 만든다고 감상을 말했다. 영어과 여학생은 댄스곡이나 랩 음악은 조만간에 싫증이 나지만 고전음악은 깊이가 있어 물리지 않는다고 했다.

신세대는 우리세대 보다 다양한 소재를 소화할 수 있는 진화한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삿갓의 남녀 시 ‘위위불염경위위’

노래를 듣는 시간과 별도로 나는 시를 읽는 시간도 따로 만들었다. 절정(絶頂)의 시를 쓴 민족시인 이육사의 ‘광야’, 세월의 저울로 삶의 무게를 잰다는 김광규의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아일랜드의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지혜는 시간이 되어야 오는 법(The Coming Of Wisdom With Time)’ 등 역사와 세월과 젊음을 노래한 시 몇 편을 돌아가며 읽게 했다. 그 가운데 영미문학 최고의 시인으로 꼽히는 예이츠의 시는 다음과 같이 세월의 경구를 담고 있다.

“당신은 무성한 잎사귀와 화려한 꽃을 흔들며 젊음을 자랑했지만 그 허위의 삶을 거쳐 이윽고 잎이 이울 때에 비로소 지혜를 얻는다.”

여기에 나는 물의 성질처럼 구름의 마음처럼, ‘수성운심(水性雲心)’으로 방랑한 김삿갓(본명 김병연)의 시 두 수를 더 읽어보게 했다. 그 하나는 남녀의 관계를 읊은 ‘운우지정(雲雨之情)’이다.

“해도 해도 싫지 않아 다시 하고 또 하고
안 한다 안 한다 하면서도 다시 하고 또 하고”

원문 한시로 보면 운율이 독특하게 살아난다.

“위위불염경위위 불위불위경위위”
(爲爲不厭更爲爲 不爲不爲更爲爲)

남녀 간의 관계를 읊은 시지만 음란하지 않고 유머러스하다. 남녀의 정은 아무리 해도 끝이 없고 아무리 해도 싫지 않다는 것을 절묘하게 비유했으니 말이다.

절개의 상징 연모의 대상, 조선기녀

김삿갓의 시중에는 기생을 연모하여 지은 것도 있다.

‘이대로 저대로 되어 가는대로’ 방랑하던 김삿갓은 함경도 단천에 잠시 정착하여 서당 훈장을 3년 동안 했는데, 이때 스물세 살인 기생의 딸 가련과 사랑하며 애틋한 연정을 표현하여 ‘기생 가련에게’를 썼다. '가련'을 반복하여 쓴 파격시다.

“가련한 행색의 가련한 몸이/ 가련의 문 앞에 가련을 찾아왔네
가련한 이 내 뜻을 가련에게 전하면/ 가련이가 가련한 마음으로 알아주겠지”

나는 일찌기 조선기녀의 정절과 사랑에 관심이 많았다. 수주 변영로의 ‘논개’는 “아, 강낭콩꽃보다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하고 노래하여 조선기녀의 하늘을 찌르는 절개를 기렸다.
3년 전 개성에 갔을 때 들은 말이다. 북한 측 고려박물관 강사 리옥란이 안내하던 중에 여성의 육체를 비유하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송악산 연봉의 지형이 만들어내는 윤곽은 임신한 여인이 머리를 풀고 누워서 분만하는 듯한 자세라는 말이다. 그런 송악산 어머니의 정기를 타고났는지, 명지 황진이가 지은 시조는 격조 높은 정화(情火)의 절창이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요컨대, 나는 오래간 만에 신세대 대학생과 어울려 세대교류를 꾀했다. 들리브의‘꽃의 이중창’을 듣고 김삿갓의‘위위불염경위위’를 읽으며 구원한 여성의 존재를 다시 확인했다. 그리하여 젊으나 늙으나 ‘사랑의 정화’는 상수(常數)라는 것을 그들과 함께 확인했다. 이만하면 세대의 교감에 상당한 성과를 올린 출강이었다고 자평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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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훈저널 [취재여담] 2016년 9월 가을호

 

백면서생단련기(鍛鍊記)

 

 

'김산 아리랑' 취재 일지

 

캐나다 토론토에 사는 성우제 문우는 왕년에 원() 시사저널에서 동고동락한 후배기자다. 우리는 시사저널에서 구성원의 주력이 떨어져 나와 지금의 시사IN을 발행하면서 원조 시사저널을 원() 시사저널이라고 구분하여 부르고 있다.

그런데 인연이 남다른 후배기자 성우제가 근자에 멋진 스승들’ 9인에 관한 책을 내면서 그 중에 한 사람으로 나를 뽑다니 매우 계면쩍은 일이다. 내가 신간인 멋진 스승들-딸깍열어주다(도서출판 강)를 우송받은 것은 발행 당일인 2016817일이다.

 

13년 만의 편지

작년 83일 밤이었다. 전자우편을 열었더니 성우제입니다라는 제목이 2227분에 올라있었다.

  안 주간님, 오랜 만에 인사드립니다. 이곳에 온 지 벌써 13년이 넘었습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8월 중순에 한국에 나갈 일이 생겼습니다. 이번에는 아예 가기 전에 연락드리고, 가서 꼭 뵙고 오고 싶어서요. ()

토론토에서 성우제 올림

 나는 이튿날 오전 957분에 답신했다.

  친애하는 성우제 기자, 817일 월요일 오후 5시 반에 인사동 관훈클럽신영연구기금(종로구 인사동97) 사무실로 오세요. 당일 아리랑가든에서 간단히 저녁 들고 성우제 환영 행사로 노래방에 갑니다. 연락 닿는 시사저널친구들 을 부르지요.”

 

 그리하여 나는 귀국하여 찾아온 성우제 기자를 위해서 성우제를 위한 음악의 밤을 마련하고 원 시사저널구우들과 어울려 한 밤을 보냈고, 며칠 후 그를 인사동의 우리 사무실로 불렀다.

성우제 군은 약속시간보다 40분이나 앞당겨 3층 집필실로 쳐들어왔다. 책상 앞에서 작업하던 나를 보자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부터 찍어대며 재미있는 데요하며 킬킬거렸다. 나를 기습하여 사진 공세를 펴며 취재 작업을 즐기는 것이었다. 그날 성우제 군은 매우 감각적인 옷차림이었다. 랄프로렌 폴로 상표의 티셔츠는 영산홍 꽃빛깔처럼 불타는 진홍색. 거기에 흑색의 면제품 반바지 차림으로 검은색 배낭가방을 메었으니 적과 흑이 조화로웠다.

어라, 성우제 군도 반백이 넘으니(그는 1963년생이다) 이제 의상의 앙상블을 터득하였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백면서생 성우제

내가 시사저널로 가게 된 경위를 밝히기 위해 1988년 겨울로 되돌아가본다. 어느 날 '사쓰마와리'(경찰기자) 후배인 신중식 군이 창간을 준비하는 시사저널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일보논설위원실로 나를 찾아와서 시사저널제작의 총책을 맡아달라고 간청했다. 일찍이 나는 호방한 성격의 신중식에게 신포’(신대포의 줄임말)라는 별칭을 부여한 바있다. 나는 마침 관훈클럽 제35대 총무로 선임되어 1년 임기의 직무를 수행해야 하기에 운신하기 어렵다고 거절했다.

1년 후 겨울 총무 직을 마무리 할 무렵 '신포'가 다시 나를 찾아왔다. 부사장직을 맡고 있던 창간의 주역 박권상 주필도 따로 내 소매를 끌어당겼다. 또 최원영 회장이 직접 한국일보로 나를 영입하러 거동한다 하기에, 거듭된 초빙에 응하여 편집주간 겸 상무이사 직을 받아들이고 시사저널에 부임한 것은 198911월이다.

창간 직후 시사저널편집국은 각처에서 모여든 젊은 기자들의 개성이 서로 부딪쳐 불꽃을 일으키고 있었다. 나는 부임한 직후부터 편집부에 배속되어있던 성우제에 눈이 갔다.

고려대학교 불문학과 김화영 교수의 수제자인 성우제는 대학원에서 석사논문(제목은 '앙드레 지드 소설론'이다)을 쓰고 박사과정을 준비하던 백면서생(白面書生)이었는데, 대학선배 서명숙(시사저널편집장. 현 제주올레 이사장)의 천거로 박권상 주필과 진철수 주간 앞에서 홀로 작문시험을 본 후 10월초 편집부에 배속되어 있었다. (모두 아는바와 같이 박권상, 진철수 두 분은 관훈클럽 창간동인이다.)

성우제 기자는 168센티미터의 신장에 선() 한 얼굴을 하고 행동거지가 매우 겸손했다. 나는 때 안 묻은 이 백면서생을 사회부에 투입하여 저널리즘의 강골로 단련시키고자 했으나 사회부에 공석이 나지 않아 우선 문화부에 배치했다. 성우제에게 문화부 발령을 통고한 것은 19925, 부친상을 당한 그를 독산동으로 찾아가 문상하던 자리였다.

그리하여 백면서생 성우제는 문화부 기자의 시대를 맞아 일취월장한다. 이른바 '남이장성'(남문희·이문재·장영희·성우제)의 일원으로 조랑말을 타고 앞만 보고 달리게 된다.

 

3대 기획 아리랑

시사저널제작 책임자로서 내가 직접 기획하여 성공을 거둔 커버스토리는 세 가지이다.

첫 번째는 스티븐 호킹이었다. 1990시사저널은 나의 발의로 세 차례에 걸쳐 우주론자인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우주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을 표지 기사로 올렸는데, 미국인 미술부장 제니스 올슨과 편집부 선임기자 김상익의 감각과 호흡이 맞아 떨어져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었다. 스티븐 호킹이 시사저널의 초청으로 한국에 온 것은 그해 9월이었다.

두 번째는 내가 오래도록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베트남 통일열차 탑승취재였다. 나는 경향신문필화사건의 주인공이었던 표완수 국제부장이 적격이라고 여겨 그를 호찌민시로 특파했다. 그가 험한 임무를 빈틈없이 수행하여 써낸 기사는 1991110일자 커버스토리를 장식했다. 제목은 사이공-하노이 통일열차 23일 한국기자 첫 탑승기이다.

세 번째는 백면서생 성우제가 취재의 주연(主演)을 맡은 장장 15쪽의 아리랑의 노래’(시사저널19939월 합병호)이다.

사진=성우제 기자 보도 김산의 아리랑’(시사저널19939월 합병호 본문)

 

처음에 나는 국제부 기자를 중국의 북경과 동북지구(조선족자치주)로 특파할 생각이었는데, 문화부 김현숙 차장이 김산의 아리랑 취재라면 성격상 마땅히 문화부 소관사라고 주장하고 나왔다. 나는 김현숙 차장이 소설가 최인훈을 존경하고 분단을 주제로 한 최인훈의 대표작 광장을 걸작으로 꼽기에 문학소녀 출신이라고 여겼다. 글을 쓸 때는 손이 야무져서 나는 그가 겉은 유해보이지만 속은 표독하다는 뜻으로 외유내표(外柔內慓)’하다고 평했다.

성우제 가자는 김현숙 데스크를 일러 말하기를 자신을 탄탄하게 길러준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선배라고 한다. 김현숙은 성우제를 어떻게 말할까.

천품이 좋고, 특히 사회문화적 맥락을 읽는 트렌드 기사에 능했다. ‘독고다이(특공대식 독단 취재)’에 크레디트를 주는 회사 특유의 분위기 속에서도 팀플레이를 할 줄 아는 드문 기자였다.” 표완수 현 시사인 발행인은 성우제를 양질의 기자, 문학소년 같은 기자라고 기억하고 있다.

 

민족 통합의 노래

 나는 두말없이 성우제 기자를 연변과 북경에 특파하기로 결정한다. 그런데 성우제 기자가 며칠 째 편집국을 서성대며 중국으로 떠나지 않는다. 그를 붙잡고 물어보니 중국 입국 사증을 받는데 닷새가 걸린다합니다하고 답한다.

나는 일갈했다. “시간 없다. 관광 비자를 사라!”

성우제 기자는 혼비백산한 표정으로 튀어나갔다. 다음날 백면서생은 중국 청도 행 비행기를 탔고, 미리 수배한 현지 여행사의 조력으로 청도 입국심사대에서 사증을 받는데 성공한다. 청도에서 북경으로 날아간 그는 북경대학 최용수 교수를 취재하여 김산의 시 한해 동지를 조문하여(弔韓海同志)’를 발굴한다.

 

사진=미국 작가 펄벅이 발간한 SONG OF ARIRAN1941년 초판 표지(김산-님웨일즈공저)

 

이후 북경-장춘(항공편), 장춘-연길(열차편)을 연결하는 취재 경로는 백면서생에게는 난생 처음 경험하는 구절양장의 험하고 고된 길이었을 터이다. 새벽에 최종 목적지인 연길(옌지) 역에 도착하니 김현숙 차장을 통해 연락이 닿은 최명희 작가(월간 신동아에 연재하던 혼불의 자료를 수집하러 여행 중이었다)가 대기하고 있었다.

성우제 기자는 김산의 아리랑이 그 연고지인 중국에서 어떻게 되살아나 퍼져 나가고 있는지, 전모를 소상하게 밝히는데 취재의 초점을 두었다. 그는 저인망으로 훑어가듯이 연변역사연구소 한중광 교수와 권립소 소장, 연변대학교 박창욱 교수, 연변 작가 이철용 씨 등을 두루 만나 서지적(書誌的)으로 전모를 밝히는 한편 많은 현장 자료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성우제 기자가 중국 본토 취재를 담당하는 동안 동경의 채명석 통신원은 노련한 경험에서 아리랑의 노래공저자인 님 웨일스를 추적한 재일동포 작가 이회성 씨를 취재하고 아리랑의 노래일본어판의 내력을 알리고 아리랑의 노래가 미국 및 캐나다로 이어지는 경위를 밝혔다.

시사저널60년 만에 추적하고 재평가한 민족통합의 노래 김산의 아리랑커버스토리는 성우제 기자가 주연하고 채명석 통신원이 탄탄히 뒷받침 한데다 김현숙 차장이 야무지게 감독하여 완성한 것으로 총 기획자인 나를 한껏 고무하였다.

김현숙 대표(‘케이무비 러브영화사랑 외국인 모임)는 이렇게 말한다.

성우제 기자는 첫 경험으로 아리랑취재의 엄청난 기회를 잡았다. 그 현장 취재를 통해서 성우제 기자는 부쩍 성장했다. 이후 도하 일간지가 그의 특종 기사들을 받는 일이 별스럽지 않을 정도로 전문기자가 되었다.”

사진=백면서생 성우제(안병찬 찍음, 2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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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사람-김영미 피디

 

전쟁 철새들

 

'마크'의 죽음

김영미의 공포

 

스웨덴 프리랜서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의 시장 근처에서 2006년 6월 어느날 프리랜서인 마크 존

라사들레르가 취재하던 중에 총탄에 맞아 죽었다. 30대의 마크는 주로 영국 방송

(BBC 및 스카이 텔레비전)과 계약하여 분쟁지역을 취재하던 스웨덴 출신 비전속

기자(프리랜서)였다. 그는 부인과 두 자녀를 유족으로 남겼다.

김영미 피디는 마크의 죽음을 서울에서 들었다. 마크와 연락이 통 안 되어서 전화

로 안부를 묻다가 알게되었다. 동원호를 납치한 해적을 취재하러 소말리아로

기로 결심하고 출발하기 일주일 전 일이었다.

그녀는 마크의 죽음에 임해 분쟁지역 취재가 얼마나 위험한지 실감하면서 두려움

을 느꼈다고 말한다.

미국과 서방 동맹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점령하자 수많은 특파원들이 카불

에 몰려들었다. 김영미는 2001년 12월 어느날 카불 시내에서 한 저널리스트의 소

개로 마크를 알게 되었다. 2004년에는 미국 대통령 부시가 이라크 침략전쟁을 일

으켰다. 김영미는 바그다드의 특파원 집결지인 팔레스타인 호텔에서 마크를 다시

만났다.

김영미 피디는 철새 처럼 전쟁터를 옮겨 다니다가 마크와 마주치면 대화하며 정

보를 나누었다. 마크는 그녀가 분쟁지역에서 마주치며 친구가 된 몇 사람의 저널

리스트 중 하나였다.

그녀는 소말리아 해적을 취재하러 갈 때 현지 호송원(보디가드)을 16명이

나 고용했다. 마크의 비극을 보고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마크는 생전

에 위험한 지역에 갈때는 안전조치로 보대가드를 고용해야한다고 조언한

적이 있다고 한다.

 

 

프가니스탄 파르완에서 미군 산악부대 종군취재 중 (사진=김영미 제공)

 

아프간 '임베디드 저널리즘'

 

 

김영미는 2007년 3월부터 석달동안 아프가니스탄의 파르완주에 머물렀다. 그녀

는 아프간에서 반미감정으로 인해 일어난 폭동과 미군이 오사마 빈 라덴을 잡겠

다고 펼친 수색작전을 취재했다.

그녀는 아프가니스탄의 미군이 운영하는 '끼워넣기 종군 프로그램'(임베드 프로그

램:Embed Program)도 활용했다. 미군은 제10산악부대에 그녀를 배치했다. 그녀

는 군용헬멧을 쓰고 10kg이 넘는 방탄조끼를 착용하고 미군 이동차량 '험

비'(Humbee)에 동승해서 돌아다녔다. 험비는 미군이 1989년에 파나마를 침공할

때 처음으로 사용한 다목적 기동차량이다.

일본 텔레비전 방송 '니테레(NTV)'는 당시 김영미가 취재하고 연출한 단편 다큐멘

타리 '아프가니스탄의 현재'를 두 편 방영했다.

 

네팔에서 쓰러지다

김영미 피디는 2009년 11월 초에 네팔 산중에 들어가서 그곳 사람들이 자연속에

서 사는 삶을 담은 인간 기록물(휴먼 다큐멘터리)을 제작하고 있었다. 그녀는 몇

명의 사진 작가들을 이끌고 네팔 산중 마을에 살면서 작업하던 중이었다.

2010년 2월 중순에 김영미는 갑자기 숨이 멈추는 것을 느끼며 실신했다. 부정맥

을 앓고 있던 그녀는 귀국해서 심장 근육을 살리는 수술을 받은 후 회복했다.

 

 

김영미 경력

나이 : 42010년 6월 현재 40년 1월(1970년 5월 생)

고향 : 경기도 의정부

키 : 163㎝ 몸무게 : 재보지 않음

대학 전공 :

대구 경일대학교 졸업

제1전공 행정학, 부전공 사진영상학

취재 경력 :

1999년 동티모르 첫 취재(1년 간)

이후 10년 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소말리아, 네팔 등 30개국 취재

 

작품 :

목록 정리 하지 않음

수상(네이버 인물정보) :

2002년 여성인권 디딤돌상

2004년 일본 NTV 10대 디렉터상

2004년 MBC 방송대상 공로상

2006년 제4회 한국여성지도자상 젊은지도자상

 

전현직 :

전 일본 NTV 국제부 피디

전 크릭앤리버 코리아 피디

시사IN 분쟁지역전문 편집위원

직업 :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또는 분쟁지역전문취재 연출자

성격: 내성적

특질 : 담대함

장래 계획 :

60살 때 이라크 이주

60살 이후 '나의 취재기' 집필 


                                                                   2010. 06. 23
                                                               posted by 안병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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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안광(眼光)

 

탈오리엔탈리즘이 필요한 이유

 

 

2015년 을미년 청양(靑羊)의 해에 베트남은 통일 40주년을 맞았고 한반도(조선반도)는 광복 70주년을 맞았다. 베트남은 나로 하여금 아시아 사람으로서의 관점을 확고히 다지도록 만든 나라이다.

 

 

사진=베트남 통일 4.30해방기념일의 발. 호찌민시 동코이 거리를 메운 오토바이 축제인파(2012년 4월 30일 안병찬 찍음)

 

 

통일열차오디세이

 

남부 사이공 정권이 패망하고 베트남이 사실상 온전하게 통일을 달성한 날은 1975430일이었다. 내가 그 도시를 공중 탈출한 후 9개월 1일을 넘긴 19762월 초 어느 날, 한국일보편집국 외신부에서 근무하던 나는 갑자기 멀리서 울려오는 열차의 기적소리를 들었다. 통일베트남이 남북 4300리를 잇는 등싼통녓(통일열차)’를 개통했다는 소식을 외신이 타전하던 순간이었다. 그날 나는 외신 기사를 토대로 베트남 통일열차 개통의 기사를 썼다.

나는 오래 동안 부산과 신의주를 연결하는 통일열차의 꿈을 꾸어온 터였다. 오늘도 내 마음 속에서는 한국 비무장지대 장단(長湍) 역 터에 있는 녹슨 증기기관차와 베트남의 통일급행열차가 교차하고 있다.

 

 

아시아적 가치

 

 

2012919일 나는 한국기자협회의 초청을 받아 '한국-베트남 기자 콘퍼런스'에서 특강을 했다. 참가자는 양국의 최고참 언론인 각 12명씩 모두 24명인데, 베트남 측은 공산당 중앙위원으로 베트남기자협회장이자 공산당 기관지 '인민' 편집국장인 뚜언 후가 단장이고 박사학위를 가진 언론인도 2명이 들어 있었다. 한국 측 참가자는 한겨레신문권태선 편집인, 연합뉴스 김선한 국장, KBS 정필모 해설위원, 한국일보이계성 논설위원 등이다.

그날 특강에서 나는 분단시기인 1971년 주월특파원 시절에서 최근에 이르기까지 37년 동안 기록해온 사진자료 130장을 파워포인트에 담아서 보여주며 실황을 설명해나갔다. 특별히 강조한 것은 바로 '아시아적 가치'였는데, 동아일보 논설위원이 '아시아적 가치'가 뭐냐고 질문했을 해왔다. 나는 아시아인의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것은 아시아의 안광(眼光)으로 세상을 직시해야한다는 뜻이었다. 아시아적 가치란 '탈오리엔탈리즘의 가치라고 말할 수 있다.

 

통일 베트남에서 배운다

 

 

베트남은 4·30 항미전승과 5·7 항불전승의 정신을 근간으로 삼아 정경분리의 이름 아래 개방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우리가 베트남에서 배울 점은 불퇴전의 자주정신이다.

특히 우리는 베트남의 통일운동에서 배워야 할 점이 많다. 한국과 베트남의 분단과 통일의 조건은 다른 점도 있고 동일한 점도 있다. 베트남은 대륙 중국에 1000년 간 맞서며 독립을 지켜냈고 유럽 강대국 프랑스에는 100년을 저항한 끝에 무조건 항복을 받아냈다. 더구나 세계 최강국가인 미국을 상대해서는 20년 전쟁을 벌여서 끝내 패퇴시켰다. 그 강인한 저력으로 베트남은 스스로 통일을 왕성했다. 특히 베트남은 미국과는 종속 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눈높이로 현실적인 전략을 구사한다.

많은 한국인들은 베트남의 자존을 보지 못하고 오직 경제적인 잣대 하나로 베트남을 평가하려든다. 최근 베트남 달랏대학에서 한국학과 교수로 재직하는 유태현 전 베트남 대사는 내가 관여하는 주간 베트남 교민신문(베한타임스)에 이런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우리가 베트남에 우월감을 가질 근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는 베트남 국민은 물질적인 풍요보다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여 국가와 개인의 최고 가치인 독립과 자유를 국가 이념으로 설정한 품위 있는 국민이라고 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다.

 

 

사진=호찌민시 한국총영사관 국기게양대 앞. 미스코리아 신세대 후보들에게 33년전 사이공 패망 직전 이 자리에서 태극기를 마지막으로 내리는 장면을 촬영하여 기록한 경험을 들려주었다. 사진 한국일보 김주성 기자(2008년 7월)

 

 

미국주의와 서구주의

 

 

이에 즈음하여 나는 한국 사회에 뿌리를 깊이 내린 두 가지 문제를 짚어보고자 한다.

그 첫 번째는 한국사회의 주류세력이 선도하는 '미국주의''서구주의'의 문제이다. 이 주류세력을 구성하는 것은 지식인과 권력자인데 미국주의와 서구주의를 동화(同化)하여 마치 "우리 것이 아니고 서양 것이 최고다"라고 여기는 모습이다. 그들은 오리엔탈리즘에 젖어있다. 오리엔탈리즘은 동양문명을 주변화하는 서양 중심관이다.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을 위압하고 지배하고 재구성하는 서양문명의 관점이고 책략이다.

두 번째는 한반도에 사는 우리의 정체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다. 우리는 아시아인이면서 동양인이다. 그런데 흔히 우리는 중국문화와 동양문화를 혼동하고 있다. 우리는 중국문화권을 동화한 것이 아니라 범동양문화권에 귀속한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야한다.

우리가 '아시아의 안광(眼光)'을 우리의 사회문화적 테제로 설정한 까닭이 거기에 있다.

 

(2015년 1월 작성. 매거진 N 1월호 안병찬 코멘터리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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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무지개'처럼

 

광야 울리는 절명시(絶命詩)

 

김영삼 문민정부가 들어선 시절 서울대학교 언론학부에 출강할

때부터 나는 강의 첫 머리에 수강생 중 한 사람을 불러내 시()

낭송하도록 했다. 빼놓지 않는 시로 이육사의 절명시(絶命詩)

가 있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하여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친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고선 지고

큰 강물이 드디어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가득하니

내 여기에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신세대 피 끓게 하는 저항의 노래들 

 

 

사진=독립기념관 홈페이지(http://www.i815.or.kr)

 

 

젊은이들에게 이 시를 읽은 소감을 물으면 입을 모아 피가 끓는

고 대답한다. 어떤 이는 이육사가 강철로 된 무지개를 그렸던

민족시인이라고 설명한다. 일제의 감옥을 17 번이나 드나든 독립

투사 이육사의 이 웅혼(雄渾)한 시는 우주의 탄생과 가난한 현재

의 삶과 초인을 목 놓아 부를 천고의 미래를 담아냈으니 감동하지

않을 신세대는 없다.

가끔은 조선 선비인 위당 안숙(安潚)의 애국 절명시(絶命詩)

낭송토록 한다.

 

오호라! 사람의 태어남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는데,

 

그 죽음이 진실로 마땅히 죽어야 할 자리에서 죽을 수 있다면

 

그 죽음은 도리어 사는 것보다 현명한 것이니,

 

이는 서슬이 시퍼런 칼날을 밟고서도

 

자신의 목숨을 돌아보지 않았던 이유인 것이다

 

 

위 한 구절은 대한제국 말 충절의 선비 위당(韋堂) 안숙(安潚)이  

지은 절명시의 서두로서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는 위당의 묘비명으

로 새겨졌다.

 

 

대쪽 같은 선비 정신

 

위당은 왜적이 대한제국을 침탈한 1910년 경술국치에 통분하여

자결 보국한 나의 할아버지이다. 젊은이들은 이 절명시 역시 비장

하면서도 추상같은 기개가 하늘을 찌르는 격문(檄文)이어서 가슴

을 울린다고 말한다. 그런데 유독 사회학과 남학생이 반기를 들었

. 운동권에 속한 그는 양반계급이 지배계급이자 기득권세력이

라고 흑백논리를 폈다. 그는 선비와 양반을 구분하지 않고 날을

세운 것이었다.

양반은 고려와 조선 시대에 국왕을 중심으로 동쪽에 문반(文班)

서고 서쪽에 무반(武班) 서서 두 반열을 만든 데서 비롯했다. 지배

계급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문관 관료를 총칭하는 사대부(士大夫)

라는 명칭도 붙었다. 양반은 배타적인 특권을 향유했으며 군역(

)을 면제받고 노비를 마음대로 부리며 기득권을 누렸다.

그렇지만 선비는 유교이념을 구현하는 인격체이자 신분계층으로

서 양반과 구분한다. ‘선비정신이라는 말은 명분과 의리를 대쪽

처럼 밝혀서 덕치를 실현하려 한다는 뜻을 담고있다. 시종무관장

과 대신을 역임한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1905(광무5)

대한제국 2천만 동포에게 죽음을 고하노라(警告大韓二千萬同

胞遺書)”하는 절명시를 쓰고 자결했으니 역시 만고의 의인이거늘

사회학도의 좁은 시야는 그만큼 여물지 못했다.

 

사진=표지(옥당 제공)

 

마침 조선의 지식계보학(옥당)이 나왔다. 저자인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최연식 교수(동아시아고전연구소 소장 겸임)는 정

치 동학적 시각으로 역사에 접근하여 지식권력의 시대를 풀

어낸다. 그는 조선의 역사는 권력 암투의 역사로서 국가가 힘의

논리에 따라 지식인을 공인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고 보았다.

체적으로 조선의 지식인 15명을 문묘에 종사하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고 그 일이 조선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설명

하고 있어 흥미롭다.

조선의 지식계보학을 보고 절명시들을 다시 꺼내 읽는다. 목숨을 걸고 애국하는 것은 의()로운 일이다. 정정당당한 애국은 자존과 자주를 수호하는 존엄한 가치로 일컫는다.

 

(2015년 2월 14일 작성. 매거진 N  3월호 안병찬 코멘터리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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