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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백면서생’ 단련기(鍛鍊記)

관훈저널 [취재여담] 2016년 9월 가을호

 

백면서생단련기(鍛鍊記)

 

 

'김산 아리랑' 취재 일지

 

캐나다 토론토에 사는 성우제 문우는 왕년에 원() 시사저널에서 동고동락한 후배기자다. 우리는 시사저널에서 구성원의 주력이 떨어져 나와 지금의 시사IN을 발행하면서 원조 시사저널을 원() 시사저널이라고 구분하여 부르고 있다.

그런데 인연이 남다른 후배기자 성우제가 근자에 멋진 스승들’ 9인에 관한 책을 내면서 그 중에 한 사람으로 나를 뽑다니 매우 계면쩍은 일이다. 내가 신간인 멋진 스승들-딸깍열어주다(도서출판 강)를 우송받은 것은 발행 당일인 2016817일이다.

 

13년 만의 편지

작년 83일 밤이었다. 전자우편을 열었더니 성우제입니다라는 제목이 2227분에 올라있었다.

  안 주간님, 오랜 만에 인사드립니다. 이곳에 온 지 벌써 13년이 넘었습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8월 중순에 한국에 나갈 일이 생겼습니다. 이번에는 아예 가기 전에 연락드리고, 가서 꼭 뵙고 오고 싶어서요. ()

토론토에서 성우제 올림

 나는 이튿날 오전 957분에 답신했다.

  친애하는 성우제 기자, 817일 월요일 오후 5시 반에 인사동 관훈클럽신영연구기금(종로구 인사동97) 사무실로 오세요. 당일 아리랑가든에서 간단히 저녁 들고 성우제 환영 행사로 노래방에 갑니다. 연락 닿는 시사저널친구들 을 부르지요.”

 

 그리하여 나는 귀국하여 찾아온 성우제 기자를 위해서 성우제를 위한 음악의 밤을 마련하고 원 시사저널구우들과 어울려 한 밤을 보냈고, 며칠 후 그를 인사동의 우리 사무실로 불렀다.

성우제 군은 약속시간보다 40분이나 앞당겨 3층 집필실로 쳐들어왔다. 책상 앞에서 작업하던 나를 보자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부터 찍어대며 재미있는 데요하며 킬킬거렸다. 나를 기습하여 사진 공세를 펴며 취재 작업을 즐기는 것이었다. 그날 성우제 군은 매우 감각적인 옷차림이었다. 랄프로렌 폴로 상표의 티셔츠는 영산홍 꽃빛깔처럼 불타는 진홍색. 거기에 흑색의 면제품 반바지 차림으로 검은색 배낭가방을 메었으니 적과 흑이 조화로웠다.

어라, 성우제 군도 반백이 넘으니(그는 1963년생이다) 이제 의상의 앙상블을 터득하였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백면서생 성우제

내가 시사저널로 가게 된 경위를 밝히기 위해 1988년 겨울로 되돌아가본다. 어느 날 '사쓰마와리'(경찰기자) 후배인 신중식 군이 창간을 준비하는 시사저널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일보논설위원실로 나를 찾아와서 시사저널제작의 총책을 맡아달라고 간청했다. 일찍이 나는 호방한 성격의 신중식에게 신포’(신대포의 줄임말)라는 별칭을 부여한 바있다. 나는 마침 관훈클럽 제35대 총무로 선임되어 1년 임기의 직무를 수행해야 하기에 운신하기 어렵다고 거절했다.

1년 후 겨울 총무 직을 마무리 할 무렵 '신포'가 다시 나를 찾아왔다. 부사장직을 맡고 있던 창간의 주역 박권상 주필도 따로 내 소매를 끌어당겼다. 또 최원영 회장이 직접 한국일보로 나를 영입하러 거동한다 하기에, 거듭된 초빙에 응하여 편집주간 겸 상무이사 직을 받아들이고 시사저널에 부임한 것은 198911월이다.

창간 직후 시사저널편집국은 각처에서 모여든 젊은 기자들의 개성이 서로 부딪쳐 불꽃을 일으키고 있었다. 나는 부임한 직후부터 편집부에 배속되어있던 성우제에 눈이 갔다.

고려대학교 불문학과 김화영 교수의 수제자인 성우제는 대학원에서 석사논문(제목은 '앙드레 지드 소설론'이다)을 쓰고 박사과정을 준비하던 백면서생(白面書生)이었는데, 대학선배 서명숙(시사저널편집장. 현 제주올레 이사장)의 천거로 박권상 주필과 진철수 주간 앞에서 홀로 작문시험을 본 후 10월초 편집부에 배속되어 있었다. (모두 아는바와 같이 박권상, 진철수 두 분은 관훈클럽 창간동인이다.)

성우제 기자는 168센티미터의 신장에 선() 한 얼굴을 하고 행동거지가 매우 겸손했다. 나는 때 안 묻은 이 백면서생을 사회부에 투입하여 저널리즘의 강골로 단련시키고자 했으나 사회부에 공석이 나지 않아 우선 문화부에 배치했다. 성우제에게 문화부 발령을 통고한 것은 19925, 부친상을 당한 그를 독산동으로 찾아가 문상하던 자리였다.

그리하여 백면서생 성우제는 문화부 기자의 시대를 맞아 일취월장한다. 이른바 '남이장성'(남문희·이문재·장영희·성우제)의 일원으로 조랑말을 타고 앞만 보고 달리게 된다.

 

3대 기획 아리랑

시사저널제작 책임자로서 내가 직접 기획하여 성공을 거둔 커버스토리는 세 가지이다.

첫 번째는 스티븐 호킹이었다. 1990시사저널은 나의 발의로 세 차례에 걸쳐 우주론자인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우주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을 표지 기사로 올렸는데, 미국인 미술부장 제니스 올슨과 편집부 선임기자 김상익의 감각과 호흡이 맞아 떨어져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었다. 스티븐 호킹이 시사저널의 초청으로 한국에 온 것은 그해 9월이었다.

두 번째는 내가 오래도록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베트남 통일열차 탑승취재였다. 나는 경향신문필화사건의 주인공이었던 표완수 국제부장이 적격이라고 여겨 그를 호찌민시로 특파했다. 그가 험한 임무를 빈틈없이 수행하여 써낸 기사는 1991110일자 커버스토리를 장식했다. 제목은 사이공-하노이 통일열차 23일 한국기자 첫 탑승기이다.

세 번째는 백면서생 성우제가 취재의 주연(主演)을 맡은 장장 15쪽의 아리랑의 노래’(시사저널19939월 합병호)이다.

사진=성우제 기자 보도 김산의 아리랑’(시사저널19939월 합병호 본문)

 

처음에 나는 국제부 기자를 중국의 북경과 동북지구(조선족자치주)로 특파할 생각이었는데, 문화부 김현숙 차장이 김산의 아리랑 취재라면 성격상 마땅히 문화부 소관사라고 주장하고 나왔다. 나는 김현숙 차장이 소설가 최인훈을 존경하고 분단을 주제로 한 최인훈의 대표작 광장을 걸작으로 꼽기에 문학소녀 출신이라고 여겼다. 글을 쓸 때는 손이 야무져서 나는 그가 겉은 유해보이지만 속은 표독하다는 뜻으로 외유내표(外柔內慓)’하다고 평했다.

성우제 가자는 김현숙 데스크를 일러 말하기를 자신을 탄탄하게 길러준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선배라고 한다. 김현숙은 성우제를 어떻게 말할까.

천품이 좋고, 특히 사회문화적 맥락을 읽는 트렌드 기사에 능했다. ‘독고다이(특공대식 독단 취재)’에 크레디트를 주는 회사 특유의 분위기 속에서도 팀플레이를 할 줄 아는 드문 기자였다.” 표완수 현 시사인 발행인은 성우제를 양질의 기자, 문학소년 같은 기자라고 기억하고 있다.

 

민족 통합의 노래

 나는 두말없이 성우제 기자를 연변과 북경에 특파하기로 결정한다. 그런데 성우제 기자가 며칠 째 편집국을 서성대며 중국으로 떠나지 않는다. 그를 붙잡고 물어보니 중국 입국 사증을 받는데 닷새가 걸린다합니다하고 답한다.

나는 일갈했다. “시간 없다. 관광 비자를 사라!”

성우제 기자는 혼비백산한 표정으로 튀어나갔다. 다음날 백면서생은 중국 청도 행 비행기를 탔고, 미리 수배한 현지 여행사의 조력으로 청도 입국심사대에서 사증을 받는데 성공한다. 청도에서 북경으로 날아간 그는 북경대학 최용수 교수를 취재하여 김산의 시 한해 동지를 조문하여(弔韓海同志)’를 발굴한다.

 

사진=미국 작가 펄벅이 발간한 SONG OF ARIRAN1941년 초판 표지(김산-님웨일즈공저)

 

이후 북경-장춘(항공편), 장춘-연길(열차편)을 연결하는 취재 경로는 백면서생에게는 난생 처음 경험하는 구절양장의 험하고 고된 길이었을 터이다. 새벽에 최종 목적지인 연길(옌지) 역에 도착하니 김현숙 차장을 통해 연락이 닿은 최명희 작가(월간 신동아에 연재하던 혼불의 자료를 수집하러 여행 중이었다)가 대기하고 있었다.

성우제 기자는 김산의 아리랑이 그 연고지인 중국에서 어떻게 되살아나 퍼져 나가고 있는지, 전모를 소상하게 밝히는데 취재의 초점을 두었다. 그는 저인망으로 훑어가듯이 연변역사연구소 한중광 교수와 권립소 소장, 연변대학교 박창욱 교수, 연변 작가 이철용 씨 등을 두루 만나 서지적(書誌的)으로 전모를 밝히는 한편 많은 현장 자료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성우제 기자가 중국 본토 취재를 담당하는 동안 동경의 채명석 통신원은 노련한 경험에서 아리랑의 노래공저자인 님 웨일스를 추적한 재일동포 작가 이회성 씨를 취재하고 아리랑의 노래일본어판의 내력을 알리고 아리랑의 노래가 미국 및 캐나다로 이어지는 경위를 밝혔다.

시사저널60년 만에 추적하고 재평가한 민족통합의 노래 김산의 아리랑커버스토리는 성우제 기자가 주연하고 채명석 통신원이 탄탄히 뒷받침 한데다 김현숙 차장이 야무지게 감독하여 완성한 것으로 총 기획자인 나를 한껏 고무하였다.

김현숙 대표(‘케이무비 러브영화사랑 외국인 모임)는 이렇게 말한다.

성우제 기자는 첫 경험으로 아리랑취재의 엄청난 기회를 잡았다. 그 현장 취재를 통해서 성우제 기자는 부쩍 성장했다. 이후 도하 일간지가 그의 특종 기사들을 받는 일이 별스럽지 않을 정도로 전문기자가 되었다.”

사진=백면서생 성우제(안병찬 찍음, 2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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