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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찬 르포르타주 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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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향 : 역사와 문학의 저널리즘 탐험
by 안병찬

'칼럼'에 해당되는 글 24건

  1. 2016.05.04
    “<태양의 후예> 내가 홀린 전말” (1)
  2. 2016.05.02
    잡스는 죽었다. 잡스 만세!
  3. 2015.08.29
    노일대(老一代)-아버지의 본색
  4. 2015.08.28
    성우제의 '아리랑'
  5. 2015.08.18
    광음 속 아버지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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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바일 인터넷 악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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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주박’을 깰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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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J의 '언론' 휘필_ “언로의 열림과 막힘에 흥망이 걸려 있노라”
  9. 2009.05.27
    노무현의 진운, 그리고 '최후 일격'
  10. 2009.02.21
    좌우의 파당 언론, ‘틀짜기’ 하지 말라

 

 

                                                       

 

[세평 소묘]

 

“<태양의 후예>

               

                내가 홀린 전

 

  15회와 최종회를 보고 또 보니

 

 

        김포국제 공항 1975년 5월13일-소묘  안병찬

 

모연 : “근데 이 배는 왜 이러고 있어요?”

유시진 : 홀려서. 아름다운 것에 홀리면 이렇게 되죠.

강모연 : 홀려본 적 있어요?

유시진 : 있지요.……알텐데.

 

강모연(송혜교)이 모래톱 위에 올라앉은 녹슨 폐선의 아름다움에 홀려서 유시진(송중기)과 나누는 대화다.

지난 425일인가우연히 <태양의 후예>를 종방하고 편성한 특집 편을 보다가 이내 유시진과 강모인에게 홀려버렸다. 나는 월요일부터 일요일에 걸친 일주일 간 매일 밤을 지새우며 <태양의 후예>3편씩 몰아서 보아나갔는데, 특히 15회와 종편인 16회는 각각 네 번씩 보고 또 보았다.

두 사람은 16회를 이어가면서 시종일관 아주 절제된 자세를 지탱하며 절실한 두 마음을 정점으로 이끌어 나간다. 둘은 밀어(蜜語)를 적당히, 대충 나누는 것이 아니고, 어투는 꽤 무뚝뚝하지만 매무새도 단정하게 흐트러짐이 없이 서로 그리움을 주고받는 모양새다. 유시진과 강모인을 보면서 나는 가슴이 설레었고 나의 청춘을 그리워했다.

나는 이때까지 방송 신파극을 한 번도 본적이 없다. 이 멜로드라마가 아무리 거국적 관심을 모았다 하더라도 내가 이토록 심히 홀려버린 것이 스스로 이상했다. 이 멜로드라마의 무엇이 나로 하여금 정신없이 몰입하게 만들었을까?

                   

             <태양의 후예> 한 장면                       

 

모래와 바람 그리고 별

 

이 드라마에는 바람과 모래와 별의 서사가 섞여있다. 나는 젊은 시절 저널리즘에 편입한 후 앙투안 생텍쥐페리에게서 행동주의 휴머니즘이 발휘하는 능동의 정신이 인간을 불안에서 건져내는 횃불이 됨을 배웠다. 생텍쥐페리는 행동을 통해 명상하며 시적 언어로 써낸 인간의 대지에서, 그가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하여 모래밭 한 가운데 큰 대자로 누워 쏟아져 내리는 별을 올려다보는 체험을 극채색으로 그려낸다. 유시진과 강모인이 폐선의 난간에 나란히 앉아서 밤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별을 쳐다보는 서정적 장면은 생텍쥐페리의 인간의 대지를 연상시킨다.

이 드라마의 또 다른 힘은 특전사 장교인 유시진이 빈번하게 홀연히 왔다가 홀연히 사라져 위험지대 최전선(最前線)으로 가는데 있다. 이별은 그리움을 유발한다. 짐작하건데 나는 부지불식간에 기억의 자기중심적 작용으로 선택적 지각을 하여 내 경험의 밑바닥에 가닿았을 터이다.

 

선택적 지각

 

나는 전문직업인 저널리즘이 명하는데 따라 최전선(最前線)에 빈번하게 특파되어 홀연히 떠나 있기를 반복했다. 나는 한국일보에서 1970년대 어간에 도합 15회의 특파 경험을 쌓으며 비용을 가장 많이 쓴 기자로 지냈다.

19724월 북베트남군의 총공세 때, 베트남 분단선인 북위 17도선 상의 동하 최전선에 단신 뛰어들어 불타는 동하교를 촬영하려던 순간, 베트남민족해방전선 저격수의 휴대용 비-40로켓포로 조준 사격을 받아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번한 한 일은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로켓포는 10미터 거리에서 작열했고 나는 정신이 혼미하여 안내하던 남베트남군 제20전차부대 판 탄 통 중위와 지프차 뒷바퀴 밑으로 다투어 머리부터 들이미는 작태를 연출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18일 뒤 한국군 맹호부대가 북베트남 강습부대에게 빼앗겼던 638고지를 재탈환한 직후 구급 헬리콥터를 타고 종군했을 때도 혹여 수풀 속에서 난데없이 북베트남군의 자동소총의 저격을 받을세라 등골이 서늘했다.

 

1982년 11월 중동 베이루트에 특파됐을 때는 단신으로 시리아군과 팔레스타인인민해방전선(PFLP) 및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거점인 베카계곡까지 89킬로미터를 돌파했는데, 통과한 각종 검문소는 모두 29개소에 달했다. 레바논 정부군 검문소 3, 팔랑헤 우익민병대 검문소 1, 이스라엘군 검문소 2, 시리아군 검문소 19, 팔레스타인 해방군 및 이란혁명수비대(파스다란) 합동검문소 1, 레바논 및 시리아군 합동검눈소 3 개소가 그것이다. 당시에도  베카 거점의 분위기는 공포탄 소리가 콩볶듯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살벌하기 짝이 없어 자칫하면 낭패할까봐 모골이 송연했다.

 

2대 생이별의 위기감

 

끝으로 베트남의 통일결정전 때 사이공의 패망을 현장 취재한 과거사이다. 나는 1975323일 한국일보 기동특파원으로 사이공에 부임하여 430일 새벽 410분 사이공을 공중탈출하기까지 38일간 온몸으로 절대위기상황과 맞섰다. 북베트남군은 압도적인 힘으로 남베트남 영토를 북에서 남으로, 서에서 동으로 가르며 빠르게 진격해 왔다. 멸망의 초침은 분과 초를 가르며 시시각각 나를 압박해왔다.

우리가족은 6·25전쟁 때 아버지와 영영 생이별을 한 이산가족이다. 나는 사이공 멸망의 초침소리 속에서 문득 문득 내가 대를 이어 가족과 생이별을 하는 상황을 맞을지 몰라 불안과 공포감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도무지 도망칠 생각은 안 났다. 그런 힘은 저널리즘의 직업적 욕망에 근원이 있었다.

 

내가 사이공-남중국해-필리핀의 수빅기지-괌섬의 타무닝 난민수용소를 거쳐 51일 만에 김포국제공항에 귀환한 때는 1975년 5월 13일 오후, 나를 마중 나온 동료와 친지의 인파에 싸였던 그녀가 나에게 뛰쳐나와 우리는 서로 안았다. 그 장면은 사진부 박태홍 기자의 카메라에 순간 포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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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1465889158 2016.06.14 16:25 address edit/delete reply

    좋은하루되세요




 

[세평 소묘]

 

"잡스는 죽었다. 잡스 만세!"

 

 앵커 정운갑의 문자를 받고

 

 

 스티브 잡스-소묘 안병찬

 

 

난주 정운갑 앵커가 휴대전화로 다음과 같은 문자편지 한통을 보내왔다.

 

[정운갑 앵커의 문자젼지]

 

선배님 잘 지내시지요?

지난번 관훈클럽 임원 모임 때 기술결정론적 사회, 죽고 죽이는 서구와 미국 민주주의 외에는 대안이 없는가?라는 지적 참으로 귀를 반짝이게 해주셨습니다. 저도 칼럼에 선배님 말씀 인용하기도 했고요. 늘 감사드리고 언제 점심 함 모시겠습니다. MBN 정운갑 드림

 

나는 즉시 그와 통화하여 표완수 <시사인> 발행인 및 이상석 전 <한국일보> 사장과 5월 첫주에 점심식사를 하기로 약속했다.

정운갑 앵커가 자기 칼럼난인 '한쪽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에 나를 인용해서 쓴 글을 찾아읽었다.

그는 기술을 섬기지 말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앵커 정운갑-소묘 안병찬

 

 

[정운갑 앵커의 칼럼]

 

(......)"기술 결정론적 사회에 대한 의구심, 여러분들은 물음을 던져 보지 않습니까? 스티브 잡스만이 영웅이고 신이라는 사고방식 그게 전체가 된 사회인데 기술(技術)이 무엇인지, 문화적 제동은 필요하지 않은가요?”

‘최후의 베트남 종군 기자’로 안깡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존경받는 기자 안병찬 선배의 일갈이 머릿속을 산뜻하게 했습니다. 그는 또 선거의 해인 올해, 상호 유혈적인 이른바 한쪽은 죽여야 하는 한국 정치 풍토에서 서구와 미국의 민주주의 외에는 대안이 없는지를 살펴보고 경종을 울려야 한다고 지적해 공감을 얻었습니다.(......)

 

기술을 섬기지 말라

 

정운갑 앵커가 기술결정론을 보는 눈이 나와 같다는 점을 확인하니 반가웠다.

일찍이 나는 지난 2월3일에 열린 관훈클럽 역대총무간담회에서 기술결정론에 관해 이렇게 언급한 바 있다.(관훈통신 제163호, 2016년 2월)

 

 

(......)우선 저는 기술결정론적인 이 사회에 대해서 굉장히 의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마트, 디지털, 사물인터넷 이런 것들이 우리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이런 끊임없는 기술결정론의 시대에서 벗어나는 그런 무게 있는 인문적 사고를 언론계 중심으로 뿌리를 심어줘야 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지금이야 말로 독서하고 글 쓰고 거기서 사유하고 철학하는 이런 문제를 담당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스티브 잡스가 영웅이라고 생각하고 스티브 잡스가 신이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 그리고 기술이 무한이 잡종교배를 해서 하루아침이 달라지는 이러한 기술이 도대체 뭔가, 거기서 문화적 제동을 걸어야 하는 게 우리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마트 세계를 보고 공포감까지 느끼는 이런 세태에 대해서 우리가 강력한 경고의 목소리를 던지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또 저는 서구와 미국의 민주주의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믿고 현재 한국의 양당이 서로 피를 흘리며 물어뜯고 한쪽을 죽여야 내가 산다는 식으로 벌이는 이런 정치를 단호하게 배격하고 정치인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하는 새로운 모습을 우리가 보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가령 미국같은 제국적인 나라에서도 이번에 보니까 민주당에서 사회민주주의자가 한사람 나와서 소수 독점에 해한 문제를 제기해서 클린턴을 괴장히 위협하고 있더군요. 그러니까 우리가 한국정의 소위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너무나 삭막하다고 보고 정치풍토의 어떤 변화를 시도하기를 기대합니다.(......)

 

 

나는 이글 제목을 잡스는 죽었다. 잡스 만세!’로 정했다.  

잡스는 죽었다. 잡스 만세는 역설적 의미를 담고 있다. 중국의 유명한 대자보 제목을 패러디한 것이다.

1970년대 초 어느 날 중국 꽝저우시에 이일철(李一哲) 대자보한 장이 나붙었는데 그 제목은 혁명은 죽었다. 혁명만세!”였다. 중국 혁명정신이 죽고 대신 봉건사회 파시스트전제(專制)’가 대두했다고 역설적으로 뒤틀어 격렬하게 비판한 내용이다. 필자 이일철(李一哲)’ 은 광둥인민예술학원을 졸업한 동창생 리정티엔, 천이양, 황스저 3인이었다.

얼마 후 19741110일 꽝저우시 베이징로 입구에 ‘2만자 이일철 대자보가 나붙어 천하를 진동시켰다. 역시 중국공산당 체제를 꼬집어 맹공한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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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일대(老一代) 아버지의 본색

 

    영화〈국제시장〉과

              

               소설《허삼관 매혈기》 

 

 

는 영화〈국제시장〉이 우파 선동영화가 아닐까 하여 좀 망설이던 끝에 영화관을 찾았다. 영화의 시영(始映)자막(오프닝 크레딧)을 보니 영어 제목이 ‘아버지에 드리는 송시(頌詩:Ode to the father)’이다.

과시 영화 속에는 나 자신의 초상도 들어있다. 주연 황정민은 영화 첫 머리에 부산 용두산 비탈에서 부두를 내려다보며 선장이 되고 싶었다고 술회한다. 황정민은 젊은 날 해양대학에 합격하지만 찢어지게 궁핍한 삶을 면해보려고 파독광부의 길을 택한다.

 

 

사진=영화 홍보 전단

 

아버지에 보내는 송시(頌詩)

 

내가 부산 땅을 처음 밟은 것은 1956년 초 추운 겨울날이다. 역전에 있는 ‘거상 다방’에서 차 한 잔으로 언 몸을 녹인 후 해운공사를 찾아가 국립해양대학 합격자 벽보를 확인했다. 내가 국립해양대학을 택한 것은 선장의 꿈 때문이 아니라 학비 전액 국비이기 때문이라는 점이 황정민과 다르다. 해양대학 졸업 연도에 나는 본의 아니게 부산 땅에서 1년 가까이 배를 굶주리며 낭인(浪人) 생활을 했다. 당시 외제 물산의 집산지인 국제시장의 풍경 중 하나는 판매대마다 미군 하야리아 부대에서 흘러나오는 서양 식빵이 산더미처럼 쌓인 것인데 그 식빵을 실컷 먹어보는 것이 내 소원이었다. 이산가족 문제역시 극중의 황정민과 내 처지는 비슷했다. 또 우리는 모두 분단 월남 땅에 가서 일했는데 극중 황정민은 파월기술자이고, 나는 주월특파원이다.

영화는 오후 5시 태극기 하강식 시간에 모든 시민이 하던 일과 가던 길을 멈추고 국기에 향하여 경례를 해야 하는 억압시대의 풍경을 해학적으로 풍자한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이후 영화〈국제시장〉의 서사담론은 일방통행을 하며 꼬여버린다. 파월한국군 소부대가 베트콩 부대를 혈전 끝에 물리치고 마침내 주인공 황정민을 위시한 파월기술자들과 월남 반공주민을 구출한다는 설정은 한국판 람보와 같다. 금년은 베트남통일 40주년이자 한국-베트남 수교 23주년이 되는 해, 베트남 다문화 가족 15만 명이 한국에 거주하여 이제 베트남은 사돈국가가 되었다는 역사적 현실을 〈국제시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우리는 사이공의 붕괴와 통일베트남의 출발이라는 역사 객체와 계속하여 대화하면서 역사의 유기적인 진행에 조응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중국소설 《허삼관 매혈기》, 한국영화 〈허삼관〉

 

〈국제시장〉을 보기 며칠 전 나는 영화 〈허삼관〉을 관람한 바 있다. 중국의 검색포털사이트 바이두(百度)는 1월 중순 “중국 이야기(故事)가 한국영화로 나왔다”는 제목을 붙여서 한국의 하정우가 영화 〈허삼관〉을 감독하고 주역을 맡았다고 알리고 있다.

〈허삼관〉영화 배급사는 이렇게 홍보한다. “돈 없고 대책 없고 가진 것 없지만 뒤끝만은 넘치는 남자 ‘허삼관.’웃음, 눈물, 콧물 쏙 빼는 아주 특별한 가족 이야기가 시작된다.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 위화 원작.”

영화의 무대는 한국의 충남 공주이다. ‘6·25사변’이 끝난 후 전화를 입은 공주읍내, 찢어지게 가난한 가장 허정우가 좌충우돌하는 해학적인 줄거리는 시대와 배경이 〈국제시장〉과 닮은꼴이다.

중국 작가 위화(余华)가 쓴 19만 자의 장편《허삼관매혈기(许三观卖血记)》는 가족을 위해 피를 파는 한 아버지의 고단한 삶을 특유의 풍자와 해학으로 따뜻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위화가 그린 중국 아버지의 모습과 한국 아버지의 모습은 근현대사를 어렵게 살아낸 동양문화권의 정서에서 나온 것일 터이다. 〈국제시장〉과 〈허삼관〉두 영화의 홍보 전단에 오른 가족사진이 유사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영화라는 대중매체는 시대의 기록이며, 시대의 대중심리와 사회구조의 골격(프레임)이다.

 

사진=영화 속 하정우와 하지원의 결혼기념 촬영 장면

 

(2015년 1월 24일 작성. 매거진 N 2월호 안병찬 코멘터리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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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제의 '아리랑'

 

 

 

 

영산홍꽃 티셔츠

 

8월 17일 ‘성우제를 위한 음악의 밤’을 끝내고 며칠 후, 나는 인사동 우리 사무실로 그를 불렀다. 정담을 좀 더 나누고 싶어서였다.

왕년에 원(原) 「시사저널」에서 동고동락하였던 성우제 동우(同友)는 매우 감각적인 차림으로 나타났다. 랄프로렌 폴로 상표의 티셔츠는 영산홍 꽃빛깔처럼 불타는 진홍색. 거기에 흑색의 면제품 반바지 차림으로 검은색 배낭가방을 메었으니 적과 흑이 조화로웠다.

어라, 성우제 군도 반백이 넘으니(그는 1963년생이다) 이제 의상의 앙상블을 터득하였구나!

 

13년 만의 편지

 

지난 8월 3일 밤 내 전자우편에 “성우제입니다”라는 제목이 올라왔다. 22시 27분발신이다.

 

안 주간님,

오랜 만에 인사드립니다.

이곳에 온 지 벌써 13년이 넘었습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8월 중순에 한국에 나갈 일이 생겼습니다.

갈 때마다 늘 뵙는다, 뵙는다 하면서도 연락을 못 드리고 와서 늘 송구했습니다. 이번에는 아예 가기 전에 연락드리고, 가서 꼭 뵙고 오고 싶어서요. 8월 17일 월요일 정도에 시간이 어떠실는지요?

점심도, 저녁도 괜찮습니다. 과거 「시사저널」동료들과 함께 뵈어도 좋을 것 같고요.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토론토에서 성 우 제 올림

 

나는 즉각 이튿날 09시 57분에 답신했다.

 

친애하는 성우제 기자

17일 월요일 오후 5시 반에 인사동 관훈클럽신영연구기금(종로구 인사동9길 7) 사무실로 오세요. 당일 아리랑가든에서 간단히 저녁 들고 노래방에 갑니다. 성우제 환영 행사. 연락 닿는 「시사저널」친구들 몇을 부르지요.

 

성우제 동우는 약속시간보다 40분 앞당겨 3층 집필실로 쳐들어왔다. 책상 앞에서 작업하던 나를 보자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부터 찍어대며 “재미 있는데요”하며 킬킬거렸다. 나를 기습하여 사진 공세(攻勢)를 펴는 취재 작업을 즐기는 듯했다.  

 

백면서생 성우제

 

1988년 겨울 '사쓰마와리'(경찰기자) 후배인 신중식 군이 창간을 준비하는 「시사저널」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일보」의 논설위원실로 나를 찾아왔다. 일찍이 「한국일보」 시절에 나는 그에게 '신포(신 대포의 줄임)'라는 별칭을 붙였는데 성품이 호방하고 의리 깊고 가끔 얼렁뚱땅 할 줄 아는 사나이였다. 신중식은 시사저널 제작의 총책을 맡아달라고 간청했지만 나는 마침 관훈클럽 제35대 총무로 선임되어 1년 임기의 직무를 수행해야 할 처지여서 운신하기 어렵다고 거절했다.

 

1년 후 겨울 총무직을 마무리 할 무렵 '신포'가 다시 나를 찾아왔다. 부사장직을 맡고 있던 창간의 주역 박권상 주필도 따로 내 소매를 끌어당겼다. 또 최원영 회장이 직접 「한국일보」로 나를 영입하러 온다하기에, 거듭된 초빙에 응하여 편집주간 겸 상무이사 직을 받아들이고 「시사저널」에 부임한 것은 1989년 11월. 창간 직후 「시사저널」편집국은 각처에서 모여든 젊은 기자들의 개성이 서로 부딪쳐 불꽃을 일으키고 있었다.

 

고려대학교 불문학과 김화영 교수의 수제자인 성우제는 대학원에서 석사논문(제목이 '앙드레 지드 소설론'이라 했다)을 쓰고 박사과정을 준비하던 백면서생(白面書生)이었는데, 대학선배 서명숙의 천거로 박권상 주필과 진철수 주간 앞에서 홀로 작문시험을 본 후 10월초 편집부에 배속되었다. 그는 박상기 데스크 밑에서 우정제·김재태 기자와 함께 창간호 제작의 한 끝을 담당하게 되었다.

 

성우제 기자는 168센티미터의 신장에 선(善) 한 얼굴을 하고 행동거지가 매우 겸손했다. 나는 이 백면서생을 사회부에 투입하여 저널리즘 체질로 단련시키고자 했으나 사회부에 공석이 나지 않아 문화부에 배치했다. 그에게 문화부 발령을 통고한 것은 1992년 5월, 부친상을 당한 성우제를 독산동으로 찾아가 문상하던 자리였다.

그리하여 백면서생은 문화부 기자의 시대를 맞아 일취월장한다. 이른바 '남이장성'(남문희·이문재· 장영희· 성우제)의 일원이 되어 조랑말을 타고 앞만 보고 달리게 된다.

 

 

3대 기획과 ‘아리랑’

 

「시사저널」제작 책임자로서 내가 직접 기획하여 커버스토리로 올린 기사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세 가지이다.

첫 번째는 스티븐 호킹이다. 1990년 나의 발의로 「시사저널」은 전후 세 차례에 걸쳐 우주론자인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석좌교수 스티븐 호킹을 표지 기사로 올렸는데, 미술부장 제니스 올슨과 편집부 기자 김상익의 감각과 호흡이 좋아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었다. 스티븐 호킹이 「시사저널」초청으로 한국에 온 것은 그해 9월이었다.

두 번째는 내가 오래도록 호시탐탐 기다리던 베트남 통일열차 탑승취재였다. 나는 표완수 국제부장이 적격이라고 여겨 그를 호찌민시로 특파했다. 그가 험한 임무를 빈틈없이 수행하여 써낸 기사는 1991년 1월 10일자 커버스토리를 장식했다. 제목은 ‘사이공-하노이 통일열차 2박3일-한국기자 첫 탑승기’이다.

 

세 번째는 백면서생 성우제가 취재의 주연(主演)을 맡은 장장 15쪽의 ‘아리랑의 노래’(시사저널 1993년 9월 합병호)이다.

처음에 나는 국제부 남문희 기자를 중국의 북경과 동북지구(조선족자치주)로 특파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문화부 김현숙 차장이 김산의 아리랑 취재라면 성격상 마땅히 문화부 소관사라고 주장하고 나왔다.

김현숙 차장은 「연세춘추」 기자 출신으로 가을철이 되면 영국산 버버리를 입고 바둑무늬 목도리를 두르고 다녔는데, 김승웅 국장은 그에게 ‘블론디’라는 애칭을 붙였다.

나는 김현숙 차장이 소설가 최인훈을 존경하고 분단을 주제로 한 최인훈의 대표작 『광장』을 걸작으로 꼽기에 문학소녀 출신이라고 여겼다. 글을 쓸 때는 손이 야물딱져서 나는 ‘외유내표(外柔內慓)’하다고 그를 평했다. 겉은 유해보이지만 속은 표독하다는 뜻이다.

 

성우제는 김현숙 데스크를 일러 말하기를 자신을 탄탄하게 길러준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선배라고 한다. 말하자면 김현숙에게 사사(師事)했다는 뜻이다. 김현숙은 성우제를 어떻게 말할까.

천품이 좋고, 특히 사회문화적 맥락을 읽는 트렌드 기사에 능했다. 독고다이에 크레딧을 주는 회사 특유의 분위기 속에서도 팀 플레이를 할 줄 아는 드문 기자였다.” 표완수 현 시사인 발행인은 양질(良質)의 기자, 문학소년 같은 기자라고 돌아본다. 

 

           사진=펄벅이 발간한 『SONG OF  ARIRAN 

                  1941년 초판 표지(김산-님웨일즈공저)

 

민족 통합의 노래

 

나는 성우제 기자를 연변과 북경에 특파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성우제 기자는 며칠 째 편집국을 서성대며 중국으로 떠나지 않는다. 그를 붙잡고 물어보니 “중국 입국 사증을 받는데 닷새가 걸립니다”하고 답한다.

나는 일갈했다. “시간 없다. 관광비자를 사라!”

성우제 기자는 혼비백산한 표정으로 튀어나갔다. 다음날 백면서생은 청도행 비행기를 탔고, 미리 수배한 현지 여행사의 조력으로 청진 입국심사대에서 사증을 받는데 성공한다. 청진에서 북경으로 날아간 그는 북경대학 최용수 교수를 취재하여 김산의 시 ‘한해 동지를 조문하여(弔韓海同志)’를 발굴한다. 이후 북경-장춘(항공편), 장춘-연길(열차편)을 연결하는 취재 경로는 아마도 백면서생에게는 구절양장의 길이었을 터이다. 새벽에 최종 목적지인 연길(옌지) 역에 도착하니 김현숙 차장을 통해 연락이 닿은 최명희 작가(월간「신동아」에 연재하던 『혼불』의 자료 수집 차 여행 중)가 대기하고 있었다.

 

 

성우제 기자는 김산의 ‘아리랑’이 그 연고지인 중국에서 어떻게 되살아나 퍼져 나가고 있는지, 전모를 소상하게 밝히는데 초점을 두었다. 그는 저인망으로 훑어가듯이 연변역사연구소 한중광 교수와 권립소 소장, 연변대 박창욱 교수, 연변 작가 이철용씨 등을 두루 만나 서지적(書誌的)으로 전모를 밝히는 한편 많은 현장 자료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우제 기자가 중국 본토 취재를 담당하는 동안 동경의 채명석 통신원은 노련한 경험에서 『아리랑의 노래』공저자인 님 웨일스를 추적한 재일동포 작가 이회성 씨를 취재하고 『아리랑의 노래』일본어 판의 내력을 알리고 『아리랑의 노래』가 미국 및 캐나다로 이어지는 경위를 밝혔다.

 

「시사저널」이 60년 만에 추적하고 재평가한 민족통합의 노래 김산의 ‘아리랑’ 커버스토리는 성우제 기자가 주연하고 채명석 통신원이 탄탄히 뒷받침 한데다 김현숙 차장이 야무지게 감독하여 완성한 것으로 총 기획자인 나를 한껏 고무하였다.

김현숙 대표(영화 사랑 외국인 모임 '케이무비 러브')는 이렇게 말한다.

“성우제 기자는 첫 경험으로 ‘아리랑’ 취재의 엄청난 기회를 잡았다. 그 현장 취재를 통해서 성우제 기자는 부쩍 성장했다. 이후 도하 일간지가 그의 특종 기사들을 받는 일이 별스럽지 않을 정도로 전문기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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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같이 흘러간 광음 속에

 

 

아버지의 이름으로

 

 

제 아버지라는 이름은 너무나 쏜살같이 흘러간 광음(光陰) 속에서 오히려 낯선 이름처럼 느껴집니다. 아버지는 경술년인 1910년생이시니 금년 백 세 살이십니다. 백세시대라고 하더라도 현 세계에서 아버지를 만나는 길은 꿈길 밖에는 없다고 생각하니 시장 한 가운데가 뚫려버린 듯이 멍합니다.

 

아버지 103세

 

아버지가 태어나신 날은 1910년 경술년 3월 19일입니다. 그해 10월 4일 할아버지는 마흔 여덟의 나이로 경술국치에 비분하여 괴산의 오랑강에 투신하여 순절하셨으니, 아버지는 태어나신지 여섯 달의 간난 아기 때 아버지를 여의셨습니다.

오늘 아버지께 먼저 보고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나는 2010년 11월에 할아버지이신 위당(韋堂) 안숙(安潚)의 한글유고집 <선비 안숙 일지(日誌)>를 펴냈습니다. 애국지사 위당(韋堂) 안숙(安潚)의 경술국치 순국 100주년을 기념한 출판 사업이었습니다.

나는 <선비 안숙 일지(日誌)>의 서문 앞줄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가 위당의 3남 안민식(安敏植)에게서 태어난 손자로서 위당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1940년대 말 해방 공간의 서울남산초등학교 시절이었다. 어느 해 3․1절에 아버지는 ‘할아버지는 선비로서 대한제국이 경술국치를 당하자 민족적 울분을 참지 못한 나머지 순국하신 애국자시다’ 하시고, ‘그래서 할아버지의 위패가 서울운동장 식장에 마련한 순국선열 합동추모제단에 올라있다’과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위당의 손자로서, 아버지의 아들로서, 큰아버지 안태식(安台植)이 오래 동안 정리해서 편찬하신 <위당유고>를 한글로 옮기는 작업을 숙제로 안고 오다가 마침내 35년 만에 발간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나는 이 사업이 역사를 기록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출판기념회의 날 나는 이렇게 인사말을 했습니다.

“결국 <위당유고>는 한 세기를 기다린 책이라고 할 수 있으나 한 가문만의 책일 수 없고, 현재를 사는 우리가 100년의 역사로 읽고 의미를 새기는 춘추서가 될 것이다."

 

사이공 최후의 새벽에도

 

또 한 가지 아버지께 고하고 싶은 일은 내가 서른여덟 살이 되던 1975년 4월에 한국일보 기동특파원으로 또 하나의 분단국가인 베트남의 최후 통일 결전이 벌어진 사이공 현장에 나갔다가 하마터면 빠져나오지 못하고 또 한 번 가족과 생이별을 할 번한 일입니다. 용행으로 4월 30일 새벽 남부 베트남 수도 사이공에서 구사일생 탈출하여 다시 가족과 상봉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이 일을 아시고 얼마나 다행으로 여기실가 상상해봅니다.

아버지. 나는 오늘 낮 이글을 쓰기 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104번지의 제적등본 한 통을 떼어 보았습니다.

호주 안민식(부 안숙, 모 성경령), 처 한경수, 그리고 자, 딸, 자부, 손자, 손녀, 손부로 열 명이 줄을 이었습니다. 증손자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구슬 같은 딸' 3자매는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 가운데 세 명이 광음 속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신의 아내이신 한경수 여사는 1997년 7월 5일 타계하셨습니다. 그리고 맏딸의 배우자인 사위와 나의 딸인 손녀도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이들도 이제는 꿈길 속에서나 만나보게 될 것입니다.

나는 유아시절에 나를 업고 가시던 아버지의 넓은 등을 잊지 못합니다. 1950년대 초 초등학교 시절에는 매일 새벽 거르지 않고 나를 깨워 집 앞에 바라보이는 서울 남산 약수터의 산길을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1950년 9월 어느 날 9․28서울수복 직전에 아버지는 마흔 살의 나이로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시니, 이제 우리 가족의 생이별은 꿈길로 이어집니다.

아들의 이름으로 올림

 

[편집자 주 : 이글은 대한적십자사 이산가족상봉사업의 기록 자료로 2013년 11월 29일에 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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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바일 인터넷 악덕론


□사진=뉴시스

온라인은 이미 낡은 소리가 된지 오래고, 소셜 미디어가 새로 나타났는가 싶었다. 그 때 갑자기 ‘모바일 인터넷’이 쓰나미가 되어 밀려들고 있다. 

불과 10년 전에, 인터넷 위해론이 쏟아져 나온 때가 있었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장하준 교수는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인터넷의 힘과 장래성을 턱없이 과대평가하는 풍조가 있다고 경계했다. 노벨상 경제학상 수상자인 미국의 폴 크루그먼 교수는 인터넷 열풍을 탄 ‘첨단기술주의 폭등’은 피라미드형 사기수법의 결과라고 비판했다.


미래는 우리를 외면 한다


미국의 컴퓨터 과학자 ‘빌 조이’(본명 윌리엄 넬슨 조이)는 ‘왜 미래는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가?’라는 수필에서 정보기술과 기술발달을 깊이 우려했다. 그는 인터넷 기술의 급속한 진화와 인간지능을 뛰어넘는 강력한 로봇의 출현으로 인류가 종말을 맞을 가능성을 경고했다.

10년 전에 ‘인터넷 악덕론’이라는 경제수필을 쓴 적이 있다. 나는 인터넷은 본래 기생충 같아서 숙주(宿主)가 필요한 존재라고 경고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또 인터넷은 신문지면이나 영화 영사막 같은 도구에 다름 아니라고 본질을 따졌다.


기생충 인터넷


인터넷은 오직 돈을 향해 돌격하고 쇄도한다, 인터넷은 ‘속도전능주의’라는 이름의 짜릿짜릿한 전율을 줄 뿐이다, 그렇게 나는 비판했다. 이런 생각은 모바일 인터넷에도 마찬가지다.

기존 경제학은 인간의 욕망은 무한정하나 재화는 부족하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공급이 수요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인터넷 경제학은 이와 정반대의 성질을 강조한다. 인터넷 자원(정보)은 공급이 수요를 무한정으로 초과한다. 수백만 명, 수천만 명이 내리받기를 해도 줄어들지 않는 것이다.

인터넷 숭배자들은 인터넷 세계에 절대적인 강자나 영원한 약자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인터넷이 정보 부자와 정보 빈자 간의 격차를 만들고, 인터넷형 빅브라더 혹은 초 지능로봇이 출현할지 모른다는 점을 외면한다.

독일의 미래학자로 인터넷 지지자인 마티아스 호르크스는 새로운 미디어가 전통적인 미디어의 자리를 완전히 빼앗지는 못하리라고 본다. 다만 새로운 결합과 보완이 생긴다고 한다.


‘옴니넷’ 세상


그는 20년 뒤에 인터넷은 총체적 정보망의 개념인 ‘옴니넷’으로 바뀌리라고 예견했다. 인터넷 플랫폼이 모든 내용을 제공하게 되므로 모든 곳에 정보망이 있고 또 아무데도 정보망이 없는 존재가 된다는 생각이다. ‘출력장치’는 더욱 구별되어 책과 잡지가 한 층 아름답고 고상해지며 냄새를 내고 종이 같은 스크린이 될 것이라고 한다. 

전문가들은 모바일 인터넷이 열어가는 미래에 경이로운 시선을 보내며 찬양한다. 그들이 “새로운 경쟁 양상의 전개와 생활방식 패러다임의 격변”을 고무하며 소란을 떠는 것에 싫증을 느낀다. 

[2010년 2월 18일]


Posted by 안병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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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년 전, 3년차 기자로 경찰서를 출입하던 때 일이다.

사회면 가십 란인 ‘표주박’에 쓴 기사 한 편이 문제를 일으켰다. 기사는 다음과 같다.


“서울 을지로 6가에 있는 ㄱ부동산주식회사(사장 김○○)에 속았다고 20여 명이 5일 중부서에 몰려와 아우성을 쳤다. 고발 내용인 즉 ㄱ사에서 구랍 15일부터 시내 각처에 20여 명의 외무원을 풀어 연말 특별대부를 선전-수많은 사람으로부터 가입금과 일주일 불입금을 받아갔는데 연내 지불한다던 대부는 무소식이라는 것.

대조시장의 김 아무개(33)씨는 4만 원짜리 대부를 받아보려고 가입금 1천 5백 원에 나흘간 6백 원 씩을 불입했다가 떼었으며 이밖에도 5만 원짜리부터 40만 원짜리 대부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한국일보 1965년 1월 6일자)


숫자 착오


이 기사를 보고 ㄱ부동산주식회사 대표는 한국일보 발행인을 걸어서 한국신문윤리위원회에 명예훼손회복청구소송을 냈다. 제소인은 “이 기사가 터무니없는 왜곡허위보도를 하였으므로 피소인에 대하여 가장 엄한 제재를 가하는 동시에 제소인 회사의 명예를 회복하는 조치를 취하여 줄 것을 구한다”고 했다.

나는 사회부장의 지시에 따라 소명자료를 준비하다가 똑 떨어지게 소명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알았다. 경찰서를 돌다가 사건을 뒤늦게 알고 부랴부랴 취재해 전화로 송고한 탓으로 짜임새에 허점이 있었다.

언론회관(지금의 프레스센터)에 있는 한국신문윤리위원회의 제소부장 앞에 출두한 나는 조사를 받으면서 일부 숫자의 착오를 인정했다.


제소부장은 중부서에도 출장하여 형사주임과 피해자들을 증인으로 심문한 끝에, “기자의 취재동기에 불미스러운 배경(금품을 요구했다는)은 없으나 기자가 숫자상 착오를 했으므로 ‘주의환기’를 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확인’은 만족할 줄 모른다


한국언론윤리위원회의 심의결정은 표주박 기사가 난지 42일 만인 2월 17일에 났다. 주문(主文)은 “제소인의 청구를 기각 한다”(7인 위원 전원일치)였다.

“숫자 오기는 인정할 수 있으나 문책할 만한 것이 못되고, 숫자상 쌍방 주장에 다소 차이가 있으나 고의로 명예를 훼손시키는 것이라고는 인정할 수 없다.”는 요지의 이유가 붙었다.


글을 쓰는 것은 언제나 두려운 일이며, 사실 확인은 아무리 해도 부족하다는 점을 그 때 처음 알았다. 초년기자 시절에 겪은 이 ‘첫 경험’은 그 후 나의 기자 생활의 지침이 되었다.

[2009.03.20]


Posted by 안병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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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의 '언론' 휘필


“언로의 열림과 막힘에 흥망이 걸려 있노라”
(言路開塞 興亡所係)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재야시절에 특별하게 ‘언로(言路)’를 강조했다.
1994년 여름 어느 날 DJ는 서울 힐튼호텔 중식당에서 나에게 점심을 사면서 붓으로 휘날려 쓴 휘필(揮筆) 한 폭을 주었다.


김대중 휘필 한 폭

“언로의 열림과 막힘에 흥망이 걸려 있노라”라는 뜻을 담은 ‘言路開塞 興亡所係’의 여덟 자. ‘위 안병찬 주간 동령부인 혜존’에 이어서 쓴 달필이었다.

(규격=45㎝×60㎝)

DJ는 영국에서 ‘정치적 유배생활’ 1년을 보낸 후 귀국하여 그해 1월에 아시아·태평양문화재단의 조직을 완료하고 있었다.
시사저널 편집책임자로 있던 나는 그보다 1년 전에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DJ에게 정치부장을 특파하여 최초로 근항과 심정을 소상히 알리고 귀국해서 정치를 재개할 채비를 하고 있다고 예고하는 커버스토리를 실었다. 아마도 DJ는 이 커버스토리가 ‘언로’를 여는 역할을 했다고 인정하여 한 언론인에 대한 친선의 뜻으로 액자(가로 45㎝ 높이 60㎝)에 담은 ‘휘필’을 건넨 것이 아닌가 짐작한다.


‘언로’의 뿌리 율곡선생

언로(言路)는 우리 언설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말이다. 조선조를 통하여 가장 뛰어난 경세가라고 불리는 이율곡은 공론의 소통로인 언로를 열어야 최고 통치자(군주)의 독선과 독재를 막는다고 생각했다. 또 언로가 열려 있는가, 막혀 있는가 여부에 일국의 흥망성쇠가 걸린다고 믿었다. 율곡의 정치 철학은 민본주의와 위민정치를 실현하자는 것이었다.
DJ는 이율곡이 400여 년 전에 남긴 유훈(遺訓), ‘언로의 열리고 막힘에 흥망이 달려있노라’의 의미심장함을 터득하고 현실 정치에 투사하고 싶어서 나 같은 언론인들에게 알려 준 것이다.

정치의 격랑 속에 풍찬노숙, 구사일생의 삶을 살면서 힘겹게 민주투쟁과 정치투쟁 그리고 평화통일운동을 전개해온 DJ.
DJ는 언론이 사실과 진실을 균형 있게 보도하여 언로를 활짝 열어야 민주시대가 열린다고 믿고 갈망하며 ‘이율곡 유훈’을 휘필했을 것이다.

  
Posted by 안병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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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뉴시스


노무현의 진운(進運), 그리고 ‘최후 일격’

 

누벨바그의 총결로


노무현 전대통령은 진운(進運)을 타고 홀연히 등장한 인물이


었다.


그가 대통령 후보가 되어 최고 권력을 장악하는 데 걸린 시간


은 단 8개월이었다. 주류가 깨어나 보매 비주류 노무현에게

 
한판으로 보기 좋게 전복당한 꼴이었다. 그의 저돌적 승리는
 

머리에 쥐가 나서 두뇌회전이 안 되는 완매한 한국 주류에 가


해진 최후의 일격같이 보였다.
 

그렇게 출현한 노무현은 별종이 아니었다. 한국 토양을 관통


하는 수맥을 타고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사이에 돌연히 출현


한 ‘신종’이었다.

비주류 노무현의 승리와 성취는 한국 사회가 생성한 역동적인

 
‘누벨바그(새 물결)’의 총결(總結)이었다.

 
‘탈권위’, 일대과업


그는 파격적인 대통령이었다. 승기를 타고 그는 일련의 정치


실험을 꾀했는데, 그 승부수는 한 말로 요약하면 ‘탈 권


위’였다.

어찌했거나, 다시 세월은 지나가고, 이윽고 그가 대통령직을 퇴임할 때, 그의 비주류는 되레 주류에게 통렬한 반격을 당해 일대 좌절을 맛본다.

애재(哀哉)라! 이제 그는 돌이킬 수 없는 마지막 패착(敗着)의 한 수로 말미암아 스스로에게 ‘자비로운 최후의 일격’을 가한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는 황망하게 한 조각 영욕(榮辱)의 삶을 결기로 마감하고 영원의 길로 가 버렸다.

이즘에 나는 목을 매어 자살한 중국의 장칭(江靑), 고 마오저뚱(毛澤東) 당주석 미망인의 비극적인 죽음을 떠올린다. 그녀의 인간적, 정치적 죽음조차 어떤 대목은 우리 가슴에 와 닿는다.

북경교의 친청(秦城)감옥에서 무기형을 살던 장칭은 후두암으로 종신 감금상태에서 풀려나 자택에 연금되어 있다가 1991년 5월 14일 목을 매어 생을 마감했다.

좌절, 승기 놓쳐버린 최후의 ‘한 수’

이 중국 현대판 여후(呂后)의 죽음은 한 정치권력의 종말로 이해할 수 있었다. 중국공산당의 노선투쟁으로 본다면 반수정주의·반실용주의 극좌파의 종말일 수 있었다.

그보다 10년 전, 중국인민최고법원 특별재판부는 이른바 ‘임


표·강청 반당 10악집단’의 반혁명죄를 단죄하면서 재판장면


을 처음으로 인공위성을 통한 텔레비전생중계로 외부세계에
 

깡그리 공개했다. 장칭 문혁세력의 몰락을 확인하는 덩샤오핑


(鄧小平)체제의 정략이었다.

암청색 마오복에 안경을 쓰고 이어폰을 낀 장칭은 35인 재판


부가 2년 집행유예 조건부 사형 판결을 내리자 분노에 입술을

 
떨며 피고석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혁명수행은 범죄가 아니다.”


장칭은 수갑이 채워져 법정 밖으로 끌려 나갈 때 “혁명만


세!”를 절규했다.

 
“삶과 죽음은 자연의 한 조각이 아니겠는가”


세월은 유장하지만 생은 짧으니 장칭의 죽음에 지하의 마오저


뚱은 무슨 탄식을 했을까. “혁명은 죽었다. 혁명만세!(革命


死了 革命萬歲)”의 여덟 자는 아니었을까.


그런 장칭도 미국 작가 록산 위트케를 만나 죽음을 인정하는


중국의 시 귀를 읊은 일이 있다.

“거룩한 거북이가 아무리 장수한다 해도 언젠가는 죽어야 할

 
때가 오노라. 안개를 타고 창공을 오르는 비사(飛蛇)도 마침


내 먼지가 되고 말리라.”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은 인생과 권력이 한 낱 먼지 같음을 알


린다. 마지막 결기로 죽음을 향해 몸을 던지 면서 그가 남긴

 
171자 유서, 남가일몽의 덧없음을 담은 절창(絶唱)이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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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의 파당 언론, ‘틀짜기’ 하지 말라

 


격추당하기 전의 대한항공 보잉747 기


1983년 9월 대한항공 007편 보잉-747 여객기가 항로를 이탈해 사할린 상공을 날다가, 소련공군의 수호이 15전투기가 발사한 공대공 미사일에 맞아 격추되었다. 269명 몰사. 소련은 미공군 정찰기 RC-135의 침범으로 오인했다고 변명했고 세계 각국은 소련의 만행을 규탄했다. 그때 미국 대통령 레이건은 소련을 가리켜 ‘악의 제국’이라고 했다.


소련이 하면 ‘만행’, 미국이 하면 ‘과실’


5년 뒤인 1988년 7월 이란항공 665편 에어버스-300 여객기가 호루무스 해협 상공을 날다가, 경계 작전 중이던 미국 해군 이지스 구축함 빈센스 호가 발사한 함대공 미사일에 맞아 격추되었다. 290명 몰사. 미국은 전시상황의 과도한 긴장감으로 승조원이 여객기를 전투기로 오판했다고 납득할 수 없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빈센스 호를 구한 승조원의 영웅적 행동’에 메달을 수여했다.


이 두 가지 ‘만행’의 정도는 엇비슷하다. 미군의 ‘만행’ 쪽이 인명 살생 수에서 21명이 더 많다. 미국 내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95%가 소련의 대한항공기 격추는 ‘만행’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미국인의 74%가 이란항공기 격추는 “이란 기장에게 책임이 있다”고 확언했다.


1991년에 미국 언론학자 로버트 엔트만은 본질적으로 유사한 두 여객기 격추 사건을 예시하면서, 언론이 차별적· 편파적으로 보도하는 태도를 이른바 ‘틀짜기'(프레이밍 Framing) 이론으로 규정했다.


그는 미국 언론이 소련의 대한항공기 격추를 소련의 ‘비윤리적 폭거’라고 틀을 짜서 규정하고, 미국의 이란 여객기 격추는 단지 하이테크와 연관한 기술상의 문제에 연유한 ‘과실’이라고 틀을 지어 옹호한 점을 지적했다. 같은 짓을 미국이 하면 로맨스가 되고 소련이 하면 불륜이 되는 격이다. 뒤따라 샨토 아이옌거 등은 걸프전 보도에 나타나는 미국 미디어의 선동성을 지적하여 ‘틀짜기 이론’을 뒷받침했다.


 ‘사대두(死對頭)’ 닭싸움하는 한국 언론


중국어를 차용하자면, ‘사대두(死對頭)’라는 말이 있다. 수탉이 싸울 때 서로 대가리를 들이대며 죽기로 싸우는 꼴을 말한다.


한국 언론의 좌우가 파당을 지어서 ‘틀짜기’로 싸우는 모양이 그렇다. 특히 작금에 언론관계법을 둘러싸고 벌이는 이전투구는 ‘틀짜기’가 너무 심해 누가 ‘불륜’을 저지르고 누가 ‘로맨스’를 즐기는지 헷갈린다.


미디어는 의제를 만들면서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호의적이거나 비호의적인 편견을 드러낸다. 다시 말하면 현실의 어떤 측면은 선택적으로 강조하여 수용자에게 설명하는 반면, 다른 측면은 무시하고 소홀히 하는 성향을 가졌다.

 

좌익정치를 묘사하는 데 사용하는 ‘진보적(프로그레시브)’이라는 표현도 틀짓기의 한 예다. ‘진보적’이라는 언어는 '개혁, 개선, 전진'의 능동적 의미를 가진다. 대립한 우익정치 노선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는 '보수적'이라는 표현은 '퇴보, 기득권 유지, 과거지향' 따위 부정적인 것이 된다. 친생명적(프로-라이프)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그 반대편에 서면 반 생명, 친 죽음의 기득권자가 된다.(오미영·정인숙 지음 '커뮤니케이션 핵심이론'중 ‘틀짓기 이론’ 에서)


미국 언론의 경우 1980년대 초반 이래 ‘이념적 편향’의 구설을 듣고 있다. 미국적 기준으로 ‘리버럴’은 자유주의적 진보 좌파요 민주당지지 세력이다. 그 반대편에는 말할 것도 없이 공화당을 지지하는 보수파(컨서버티브)가 있다. 이 방면의 개척적인 연구가인 조지 워싱턴 대학의 로버트 리히터 교수는 1980년 미국의 유수한 언론 매체 종사자를 조사해서 언론인들이 얼마나 좌편향 했는가를 밝힌 일이있다.


미국에서는 언론인의 이런 좌편향을 이른바 ‘자유주의적 편견(리버럴 바이어스)’이라고 한다.


한국 정치언론의 현주소는 개혁·진보적 편견과 보수·수구적 편견이 ‘사대두’ 닭싸움을 한다는 풍자적 생각을 하게 된다.


‘개혁 편파’ 개혁했어야 언론개혁이…


한 중견 방송인은 방송 진영이 ‘공정성’과 ‘정당성’을 혼용하고 있다고 비판적으로 말한 적이 있었다. 여기서 ‘정당성’은 “의(義)를 옳다”하는 언론의 옹호와 주창에서 비롯한다.


그러니 기준점이 전혀 다른 양측 언론이 서로 ‘공정성’을 다투며 대치한들 합의점이 나올 리 없다. 그들은 전혀 다른 두 세계 사람들이다.


‘사대두’ 닭싸움을 벌이는 좌우 양파에게 인과율에 비추어서 각각 차례로 묻는다.


좌는 어찌하여 스스로를 성찰하고 개혁하여 악폐를 극복함으로써 훗날에 대비하지 않았는가? 왜 권력을 잡았을 때 미리미리 ‘공영방송’의 기틀을 잡아놓지 않고 코드인사만 구가했는가?


그리고 우는 설사 좌가 스스로를 개혁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어찌하여 내용이 수상쩍기 짝이 없는 ‘언론관계악법’을 꺼내들고 힘으로 밀어붙이려고 덤비는가? 그런 돌파만능주의 체질이 용산구 한강로의 철거민 참사를 초래한 것이 아닌가?


ann-bc@hanmail.net


Posted by 안병찬 안병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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