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칼럼

성우제의 '아리랑'

 

 

성우제의 '아리랑'

 

 

 

 

영산홍꽃 티셔츠

 

8월 17일 ‘성우제를 위한 음악의 밤’을 끝내고 며칠 후, 나는 인사동 우리 사무실로 그를 불렀다. 정담을 좀 더 나누고 싶어서였다.

왕년에 원(原) 「시사저널」에서 동고동락하였던 성우제 동우(同友)는 매우 감각적인 차림으로 나타났다. 랄프로렌 폴로 상표의 티셔츠는 영산홍 꽃빛깔처럼 불타는 진홍색. 거기에 흑색의 면제품 반바지 차림으로 검은색 배낭가방을 메었으니 적과 흑이 조화로웠다.

어라, 성우제 군도 반백이 넘으니(그는 1963년생이다) 이제 의상의 앙상블을 터득하였구나!

 

13년 만의 편지

 

지난 8월 3일 밤 내 전자우편에 “성우제입니다”라는 제목이 올라왔다. 22시 27분발신이다.

 

안 주간님,

오랜 만에 인사드립니다.

이곳에 온 지 벌써 13년이 넘었습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8월 중순에 한국에 나갈 일이 생겼습니다.

갈 때마다 늘 뵙는다, 뵙는다 하면서도 연락을 못 드리고 와서 늘 송구했습니다. 이번에는 아예 가기 전에 연락드리고, 가서 꼭 뵙고 오고 싶어서요. 8월 17일 월요일 정도에 시간이 어떠실는지요?

점심도, 저녁도 괜찮습니다. 과거 「시사저널」동료들과 함께 뵈어도 좋을 것 같고요.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토론토에서 성 우 제 올림

 

나는 즉각 이튿날 09시 57분에 답신했다.

 

친애하는 성우제 기자

17일 월요일 오후 5시 반에 인사동 관훈클럽신영연구기금(종로구 인사동9길 7) 사무실로 오세요. 당일 아리랑가든에서 간단히 저녁 들고 노래방에 갑니다. 성우제 환영 행사. 연락 닿는 「시사저널」친구들 몇을 부르지요.

 

성우제 동우는 약속시간보다 40분 앞당겨 3층 집필실로 쳐들어왔다. 책상 앞에서 작업하던 나를 보자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부터 찍어대며 “재미 있는데요”하며 킬킬거렸다. 나를 기습하여 사진 공세(攻勢)를 펴는 취재 작업을 즐기는 듯했다.  

 

백면서생 성우제

 

1988년 겨울 '사쓰마와리'(경찰기자) 후배인 신중식 군이 창간을 준비하는 「시사저널」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일보」의 논설위원실로 나를 찾아왔다. 일찍이 「한국일보」 시절에 나는 그에게 '신포(신 대포의 줄임)'라는 별칭을 붙였는데 성품이 호방하고 의리 깊고 가끔 얼렁뚱땅 할 줄 아는 사나이였다. 신중식은 시사저널 제작의 총책을 맡아달라고 간청했지만 나는 마침 관훈클럽 제35대 총무로 선임되어 1년 임기의 직무를 수행해야 할 처지여서 운신하기 어렵다고 거절했다.

 

1년 후 겨울 총무직을 마무리 할 무렵 '신포'가 다시 나를 찾아왔다. 부사장직을 맡고 있던 창간의 주역 박권상 주필도 따로 내 소매를 끌어당겼다. 또 최원영 회장이 직접 「한국일보」로 나를 영입하러 온다하기에, 거듭된 초빙에 응하여 편집주간 겸 상무이사 직을 받아들이고 「시사저널」에 부임한 것은 1989년 11월. 창간 직후 「시사저널」편집국은 각처에서 모여든 젊은 기자들의 개성이 서로 부딪쳐 불꽃을 일으키고 있었다.

 

고려대학교 불문학과 김화영 교수의 수제자인 성우제는 대학원에서 석사논문(제목이 '앙드레 지드 소설론'이라 했다)을 쓰고 박사과정을 준비하던 백면서생(白面書生)이었는데, 대학선배 서명숙의 천거로 박권상 주필과 진철수 주간 앞에서 홀로 작문시험을 본 후 10월초 편집부에 배속되었다. 그는 박상기 데스크 밑에서 우정제·김재태 기자와 함께 창간호 제작의 한 끝을 담당하게 되었다.

 

성우제 기자는 168센티미터의 신장에 선(善) 한 얼굴을 하고 행동거지가 매우 겸손했다. 나는 이 백면서생을 사회부에 투입하여 저널리즘 체질로 단련시키고자 했으나 사회부에 공석이 나지 않아 문화부에 배치했다. 그에게 문화부 발령을 통고한 것은 1992년 5월, 부친상을 당한 성우제를 독산동으로 찾아가 문상하던 자리였다.

그리하여 백면서생은 문화부 기자의 시대를 맞아 일취월장한다. 이른바 '남이장성'(남문희·이문재· 장영희· 성우제)의 일원이 되어 조랑말을 타고 앞만 보고 달리게 된다.

 

 

3대 기획과 ‘아리랑’

 

「시사저널」제작 책임자로서 내가 직접 기획하여 커버스토리로 올린 기사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세 가지이다.

첫 번째는 스티븐 호킹이다. 1990년 나의 발의로 「시사저널」은 전후 세 차례에 걸쳐 우주론자인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석좌교수 스티븐 호킹을 표지 기사로 올렸는데, 미술부장 제니스 올슨과 편집부 기자 김상익의 감각과 호흡이 좋아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었다. 스티븐 호킹이 「시사저널」초청으로 한국에 온 것은 그해 9월이었다.

두 번째는 내가 오래도록 호시탐탐 기다리던 베트남 통일열차 탑승취재였다. 나는 표완수 국제부장이 적격이라고 여겨 그를 호찌민시로 특파했다. 그가 험한 임무를 빈틈없이 수행하여 써낸 기사는 1991년 1월 10일자 커버스토리를 장식했다. 제목은 ‘사이공-하노이 통일열차 2박3일-한국기자 첫 탑승기’이다.

 

세 번째는 백면서생 성우제가 취재의 주연(主演)을 맡은 장장 15쪽의 ‘아리랑의 노래’(시사저널 1993년 9월 합병호)이다.

처음에 나는 국제부 남문희 기자를 중국의 북경과 동북지구(조선족자치주)로 특파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문화부 김현숙 차장이 김산의 아리랑 취재라면 성격상 마땅히 문화부 소관사라고 주장하고 나왔다.

김현숙 차장은 「연세춘추」 기자 출신으로 가을철이 되면 영국산 버버리를 입고 바둑무늬 목도리를 두르고 다녔는데, 김승웅 국장은 그에게 ‘블론디’라는 애칭을 붙였다.

나는 김현숙 차장이 소설가 최인훈을 존경하고 분단을 주제로 한 최인훈의 대표작 『광장』을 걸작으로 꼽기에 문학소녀 출신이라고 여겼다. 글을 쓸 때는 손이 야물딱져서 나는 ‘외유내표(外柔內慓)’하다고 그를 평했다. 겉은 유해보이지만 속은 표독하다는 뜻이다.

 

성우제는 김현숙 데스크를 일러 말하기를 자신을 탄탄하게 길러준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선배라고 한다. 말하자면 김현숙에게 사사(師事)했다는 뜻이다. 김현숙은 성우제를 어떻게 말할까.

천품이 좋고, 특히 사회문화적 맥락을 읽는 트렌드 기사에 능했다. 독고다이에 크레딧을 주는 회사 특유의 분위기 속에서도 팀 플레이를 할 줄 아는 드문 기자였다.” 표완수 현 시사인 발행인은 양질(良質)의 기자, 문학소년 같은 기자라고 돌아본다. 

 

           사진=펄벅이 발간한 『SONG OF  ARIRAN 

                  1941년 초판 표지(김산-님웨일즈공저)

 

민족 통합의 노래

 

나는 성우제 기자를 연변과 북경에 특파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성우제 기자는 며칠 째 편집국을 서성대며 중국으로 떠나지 않는다. 그를 붙잡고 물어보니 “중국 입국 사증을 받는데 닷새가 걸립니다”하고 답한다.

나는 일갈했다. “시간 없다. 관광비자를 사라!”

성우제 기자는 혼비백산한 표정으로 튀어나갔다. 다음날 백면서생은 청도행 비행기를 탔고, 미리 수배한 현지 여행사의 조력으로 청진 입국심사대에서 사증을 받는데 성공한다. 청진에서 북경으로 날아간 그는 북경대학 최용수 교수를 취재하여 김산의 시 ‘한해 동지를 조문하여(弔韓海同志)’를 발굴한다. 이후 북경-장춘(항공편), 장춘-연길(열차편)을 연결하는 취재 경로는 아마도 백면서생에게는 구절양장의 길이었을 터이다. 새벽에 최종 목적지인 연길(옌지) 역에 도착하니 김현숙 차장을 통해 연락이 닿은 최명희 작가(월간「신동아」에 연재하던 『혼불』의 자료 수집 차 여행 중)가 대기하고 있었다.

 

 

성우제 기자는 김산의 ‘아리랑’이 그 연고지인 중국에서 어떻게 되살아나 퍼져 나가고 있는지, 전모를 소상하게 밝히는데 초점을 두었다. 그는 저인망으로 훑어가듯이 연변역사연구소 한중광 교수와 권립소 소장, 연변대 박창욱 교수, 연변 작가 이철용씨 등을 두루 만나 서지적(書誌的)으로 전모를 밝히는 한편 많은 현장 자료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우제 기자가 중국 본토 취재를 담당하는 동안 동경의 채명석 통신원은 노련한 경험에서 『아리랑의 노래』공저자인 님 웨일스를 추적한 재일동포 작가 이회성 씨를 취재하고 『아리랑의 노래』일본어 판의 내력을 알리고 『아리랑의 노래』가 미국 및 캐나다로 이어지는 경위를 밝혔다.

 

「시사저널」이 60년 만에 추적하고 재평가한 민족통합의 노래 김산의 ‘아리랑’ 커버스토리는 성우제 기자가 주연하고 채명석 통신원이 탄탄히 뒷받침 한데다 김현숙 차장이 야무지게 감독하여 완성한 것으로 총 기획자인 나를 한껏 고무하였다.

김현숙 대표(영화 사랑 외국인 모임 '케이무비 러브')는 이렇게 말한다.

“성우제 기자는 첫 경험으로 ‘아리랑’ 취재의 엄청난 기회를 잡았다. 그 현장 취재를 통해서 성우제 기자는 부쩍 성장했다. 이후 도하 일간지가 그의 특종 기사들을 받는 일이 별스럽지 않을 정도로 전문기자가 되었다.”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잡스는 죽었다. 잡스 만세!  (0) 2016.05.02
노일대(老一代)-아버지의 본색  (0) 2015.08.29
광음 속 아버지의 이름으로  (0) 2015.08.18
모바일 인터넷 악덕론  (0) 2010.03.11
‘표주박’을 깰 뻔 했다  (0) 2010.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