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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광음 속 아버지의 이름으로

 

살같이 흘러간 광음 속에

 

 

아버지의 이름으로

 

 

제 아버지라는 이름은 너무나 쏜살같이 흘러간 광음(光陰) 속에서 오히려 낯선 이름처럼 느껴집니다. 아버지는 경술년인 1910년생이시니 금년 백 세 살이십니다. 백세시대라고 하더라도 현 세계에서 아버지를 만나는 길은 꿈길 밖에는 없다고 생각하니 시장 한 가운데가 뚫려버린 듯이 멍합니다.

 

아버지 103세

 

아버지가 태어나신 날은 1910년 경술년 3월 19일입니다. 그해 10월 4일 할아버지는 마흔 여덟의 나이로 경술국치에 비분하여 괴산의 오랑강에 투신하여 순절하셨으니, 아버지는 태어나신지 여섯 달의 간난 아기 때 아버지를 여의셨습니다.

오늘 아버지께 먼저 보고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나는 2010년 11월에 할아버지이신 위당(韋堂) 안숙(安潚)의 한글유고집 <선비 안숙 일지(日誌)>를 펴냈습니다. 애국지사 위당(韋堂) 안숙(安潚)의 경술국치 순국 100주년을 기념한 출판 사업이었습니다.

나는 <선비 안숙 일지(日誌)>의 서문 앞줄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가 위당의 3남 안민식(安敏植)에게서 태어난 손자로서 위당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1940년대 말 해방 공간의 서울남산초등학교 시절이었다. 어느 해 3․1절에 아버지는 ‘할아버지는 선비로서 대한제국이 경술국치를 당하자 민족적 울분을 참지 못한 나머지 순국하신 애국자시다’ 하시고, ‘그래서 할아버지의 위패가 서울운동장 식장에 마련한 순국선열 합동추모제단에 올라있다’과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위당의 손자로서, 아버지의 아들로서, 큰아버지 안태식(安台植)이 오래 동안 정리해서 편찬하신 <위당유고>를 한글로 옮기는 작업을 숙제로 안고 오다가 마침내 35년 만에 발간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나는 이 사업이 역사를 기록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출판기념회의 날 나는 이렇게 인사말을 했습니다.

“결국 <위당유고>는 한 세기를 기다린 책이라고 할 수 있으나 한 가문만의 책일 수 없고, 현재를 사는 우리가 100년의 역사로 읽고 의미를 새기는 춘추서가 될 것이다."

 

사이공 최후의 새벽에도

 

또 한 가지 아버지께 고하고 싶은 일은 내가 서른여덟 살이 되던 1975년 4월에 한국일보 기동특파원으로 또 하나의 분단국가인 베트남의 최후 통일 결전이 벌어진 사이공 현장에 나갔다가 하마터면 빠져나오지 못하고 또 한 번 가족과 생이별을 할 번한 일입니다. 용행으로 4월 30일 새벽 남부 베트남 수도 사이공에서 구사일생 탈출하여 다시 가족과 상봉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이 일을 아시고 얼마나 다행으로 여기실가 상상해봅니다.

아버지. 나는 오늘 낮 이글을 쓰기 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104번지의 제적등본 한 통을 떼어 보았습니다.

호주 안민식(부 안숙, 모 성경령), 처 한경수, 그리고 자, 딸, 자부, 손자, 손녀, 손부로 열 명이 줄을 이었습니다. 증손자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구슬 같은 딸' 3자매는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 가운데 세 명이 광음 속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신의 아내이신 한경수 여사는 1997년 7월 5일 타계하셨습니다. 그리고 맏딸의 배우자인 사위와 나의 딸인 손녀도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이들도 이제는 꿈길 속에서나 만나보게 될 것입니다.

나는 유아시절에 나를 업고 가시던 아버지의 넓은 등을 잊지 못합니다. 1950년대 초 초등학교 시절에는 매일 새벽 거르지 않고 나를 깨워 집 앞에 바라보이는 서울 남산 약수터의 산길을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1950년 9월 어느 날 9․28서울수복 직전에 아버지는 마흔 살의 나이로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시니, 이제 우리 가족의 생이별은 꿈길로 이어집니다.

아들의 이름으로 올림

 

[편집자 주 : 이글은 대한적십자사 이산가족상봉사업의 기록 자료로 2013년 11월 29일에 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