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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설 속의 여인, '마담 빈'을 만나다

마담 빈 "진짜 美人은 능력 가진 창조적 여성"



'마담 빈', 베트남전 종군기자였던 내게 그녀는 전설이었다.
'파리 평화회담의 전설'의 대담이 얼마 전 극적으로 이뤄졌다.
단아하지만 결연했던 그녀를 서방언론은 '신비의 대상'으로 보았다.
부주석·교육장관을 10년씩 역임한 그녀는 베트남 최고위급 여성이다.
미스코리아 행사에서 우연히 그녀를 보았다.
긴급 인터뷰를 부탁해 만날 수 있었다.



지난 7월2일 오후 베트남의 호찌민시에서 열린 미스코리아 후보들의 한복 패션쇼 모습.‘ 한국-베트남 문화교류 한복 패션쇼’는 호찌민과 하노이에서 각 한차례씩 열려 베트남 정·관·재계 인사들로부터 한국 전통문화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탄을 자아냈다.

사진 = 하노이(베트남) 김주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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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 응웬 티 빈(Nguyen Thi Binh)
(오른) 안병찬 前한국일보 ‘사이공의 최후' 특파원· 現언론 인권센터 이사장


하노이는 중국과 1000년을 싸운 뒤, 항불 전쟁 9년과 항미 전쟁 20년을 버텨내고 프랑스와 미국을 이긴 용감무쌍한 도시다. 호찌민의 영묘가 있는 이 위대한 도시는 여전히 콧대가 높다.
지금 이 도시는 실리경제를 추구하랴, 드높은 혁명의 자존심을 견지하랴, 두 마리 토끼를 좇으며 파천황의 대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22년 전에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한 이래 경제개방의 길을 일로 매진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일보 특파원으로서 사이공의 패망을 현장 취재했던 필자가 논설위원으로 14년 만에 호찌민시(옛 사이공)를 찾아간 것은 1989년. 그때 내쳐 수도 하노이를 가보고 어느새 또 다시 19년이 흘러 이번에는 한국일보가 주회한 ‘한국-베트남 문화교류 한복패션쇼’를 참관하고 호찌민시에 있는 한국총영사관과 통일궁 현장에서 ‘특파원 역사특강’을 하기 위해 동행했다.



■ 아오자이 입고 한복 행진 바라 본 응웬 티 빈

호찌민과 하노이에서 2007 미스코리아 두 명과 2008 미스코리아 후보 51명은 저마다 한복을 갈아입고 도합 200가지 색깔의 눈부신 조화를 연출하니 그대로 한류의 물결이 되어 흘렀다.

이 순간 20대 초반 신세대인 이들은 ‘미스코리아 상업주의’라는 눈총을 거리낄 것 없이, 포괄적 동반자 관계로 발전한 왕년의 적도(敵都)와 친선하고 모국에 기여하는 한국적인 문화아이콘이었다.

태극기와 베트남 국기인 황성적기(黃星赤旗)를 게양한 하노이대우호텔은 혁명 수도에서 여전히 최고 최대의 호텔이다. 한국이 베트남에 투자하는 국가들 순위에서 첫 자리를 차지해온 저간의 정황을 일깨우는 15층 호텔.

그런데 지난 16일 밤 한복패션 문화행사가 열린 그랜드볼룸 주빈 석에서 뜻밖에‘전설의 여성’을 만났다. 밤색 아오자이에 흰 바지를 입고 나온 그녀는 한복 행진을 열심히 바라보면서 “아름답다”를 연발했다.

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 출신으로 혁명1세대 중 최고의 여성으로 꼽히는 응웬 티 빈(Nguyen Thi Binh). 그녀는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 측 수석대표로 파리평화회담에 참석하면서 서방 미디어에 의해 ‘마담 빈’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40대 초ㆍ중반의 5년간 파리에서 외교활동을 펴면서 마담 빈은 세계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서방 사진기자 레그 랭커스터는 베트남 여성의 쪽머리를 한, 단아하고 단호하며 품위 있고 결연한 그녀의 갸름한 동양미인형 얼굴들을 포착했다.

그녀가 파리평화회담 석상에서 연설하고 런던 트라팔가르 광장의 핵감축운동(CND) 집회에서 연설할 때면 세계 언론은 난리법석을 쳤다. 1970년대 초 필자 역시 사이공 주재 특파원으로 근무하면서 멀리 파리에 나타나는 마담 빈을 신비한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통일베트남의 교육부장관과 부주석을 각각 10년 씩 역임한 마담 빈은 퇴임 후 베트남아동기금 총재, 베트남평화발전기금 총재, 세계고엽제피해자총회 명예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갑자기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듯한 마담 빈의 생각을 직접 듣고 싶었다.

오늘의 이념과 관심을 투영하여 끊임없이 해석해내는 작업이 역사라면 ‘마담 빈’과의 만남을 통해서 시대의 순환을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철저한 혁명가 출신의 마담 빈이 과연 ‘여성미의 과시’를 이벤트로 삼는 미스 선발대회를 어떻게 바라보는 지 궁금했다.

1927년 생. 금년 생일이 지나 만 82세. 단아하고 결연하던 얼굴은 둥그스름한 보살 할머니 얼굴로 바뀌었다. 그러나 정신은 명석했다. 빈 총재는 뜻밖에도 한국인 양자인 홍선(하노이 허머스앤선개발 대표)씨를 통역으로 대동했다. 호찌민국립대 법대를 졸업한 홍선씨는 유창한 동시통역실력으로 인터뷰를 무리 없이 연결했다.



■ “여성 최고의 미는 여성다움이다”

(안) 여성 최고의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빈) 여성의 외형적 아름다움이 있다. 그러나 여성다움, 아름다운 전통적 여성상, 현모양처의 여성상 뿐 아니라 능력을 가진 창조적 여성상이 필요하다.

(안) 빈 총재는 항불 및 항미 전쟁에 평생을 투신했는데 현재 상황의 여성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보는가.

(빈) 전쟁 당시에는 여성의 역할이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기본적으로 여성스러움은 간직해야 한다.

(안) 여성 혁명 1세대의 최선봉으로 보아도 되는가.

(빈) 항불 및 항미 전에 앞장선 세대지만 최전열은 아니다. 본격적으로 투신한 비밀동지가 여럿 있다. 나는 여성으로 항전에 앞장선 세대의 하나일 뿐이다. 1945년 8월 혁명이 일어났을 때 열여덟 살이었다. 나는 항불 전쟁이 끝나자마자 항미 전쟁에 뛰어들어 30여 년 간 쉬지 않고 항쟁했다. 그리고 나라를 새롭게 세워 발전시키는데 참여하는 행운을 얻었다.

(안) 빈 총재가 베트남임시혁명정부 대표로 파리평화협정에 참가하고 1973년 1월 휴전이 성립했을 적에 나는 한국일보 특파원으로 남부 수도 사이공에 있으면서 휴전을 맞아 취재한 경험이 있다.

(빈) 그랬는가.

(안) 오늘 공연을 본 느낌은.

(빈) 일단 여성들이 많이 아름답다. 한국전통의상이 아름답고 화장이 아름답다.

(안) 아오자이는 어떤 의상인가.

(빈) 아오자이는 긴 옷이라는 뜻으로 민족 전통의상이다. 노동을 할 때 입는 옷은 아오바이라고 한다. 항전 시기에는 주로 아오바이를 입었다. 아오자이는 편한 옷이 아니다.

(안) 이틀 전에 미스 유니버스대회를 나짱에서 개최했는데 어떤 생각을 했나.

(빈) 직접 가보지 않았지만 그 같은 행사를 개최한 것은 좋은 일이다. 미를 뽐내며 여러 국가를 알리는 문화 활동의 일환으로 본다. 베트남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도 되고. 이런 행사를 개최하기는 쉽지 않다.

(안) 여성미의 산업화에 대한 견해는 무엇인가.

(빈) 여성은 미인대회에만 나가는 것이 아니다. 사회의 일도 하고 경제활동에도 많은 역할이 있다. 모든 부분에서 활동하고 있다.

(안) 당신은 어떤 활동에 주력했나.

(빈) 인생을 살면서 문화 활동을 생활의 일부로 삼았다.

(안) 혁명 1세대로서 신세대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귀하는 교육자로서 10년 간 통일베트남의 교육부 장관을 지내지 않았나.

(빈) 우리 세대보다 신세대는 발전했다. 우리 세대는 애국심과 조직사랑의 단체의식이 강하다. 그 당시 세대의 책임 때문이었다. 지금 세대의 문제는 전(前) 세대의 문제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전 세대의 의무로 지금도 교육문제에 노력을 들이고 있다.

(안) 지금 하는 일은 무엇인가.

(빈) 베트남아동기금 총재로 사회적으로 불우한 아동을 지원하고 따로 고엽제 피해자를 돕는 일도 한다. 평화발전재단 이사장으로서 정치활동을 한다.

(안) 한국인 젊은이를 양자로 삼은 이유가 있는가.

(빈) 우리는 2000년에 처음 만났고 2004년 한국방문을 계기로 양자를 삼게 되었다. 홍선은 귀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다.

(안) 한국 드라마를 보는 가.

(빈) 젊은이들이 많이 본다. 나 말인가. 나는‘주몽’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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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오후 베트남의 호찌민시에서 열린 미스코리아 후보들의 한복 패션쇼 모습.‘ 한국-베트남 문화교류 한복 패션쇼’는 호찌민과 하노이에서 각 한차례씩 열려 베트남 정·관·재계 인사들로부터 한국 전통문화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탄을 자아냈다. 김주성기자



* 항불·항미에 앞장선 베트남 여성 혁명1세대 응웬 티 빈은 누구

응웬 티 빈(Nguyen Thi Binh) 그녀는 통일 이후 베트남의 성장 과정을 외교부장관, 교육부장관, 공산당대외위원장(외교부장관을 지도하는 자리), 부주석의 자격으로 직접 주도해 온 인물이기 때문에 현재 진행 중인 실리추구 노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여성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여성만의 풍부한 감성뿐만 아니라 강단 있고 단호한 결단력이 요구 된다"고 말했다. 미인선발대회에 대해서는 굳이 양성평등주의의 비판적 시각을 갖지 않고 여성의 미 자체를 긍정적으로 보는 유연한 자세를 보였다.

중부지방 꽝남 성 출신인 빈 총재는 젊은 시절에 사이공에서 교사가 되어 수학을 가르쳤다. 프랑스어는 어려서 천주교계 미션스쿨에서 배웠다. 파리협상 수석대표로 활동할 때 유창한 불어를 구사하여 서방 외교관들이 감탄한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홍선씨는 빈 총재의 2004년 5월 방한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수행했는데 후에 빈 총재가 유일한 양아들로 삼겠다고 해서 모자의 인연을 맺게 됐다고 전한다. 그녀는 현재 하노이 시내의 자택에서 장남, 며느리와 함께 검소하게 생활하고 있다.

국가 연금이 나오고 아들이 베트남 최대손해보험회사 부사장이므로 생활에는 지장이 없다고 한다. 공병대 고위 장교로 근무한 그녀의 남편은 10여 년 전에 타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