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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좌우의 파당 언론, ‘틀짜기’ 하지 말라



좌우의 파당 언론, ‘틀짜기’ 하지 말라

 


격추당하기 전의 대한항공 보잉747 기


1983년 9월 대한항공 007편 보잉-747 여객기가 항로를 이탈해 사할린 상공을 날다가, 소련공군의 수호이 15전투기가 발사한 공대공 미사일에 맞아 격추되었다. 269명 몰사. 소련은 미공군 정찰기 RC-135의 침범으로 오인했다고 변명했고 세계 각국은 소련의 만행을 규탄했다. 그때 미국 대통령 레이건은 소련을 가리켜 ‘악의 제국’이라고 했다.


소련이 하면 ‘만행’, 미국이 하면 ‘과실’


5년 뒤인 1988년 7월 이란항공 665편 에어버스-300 여객기가 호루무스 해협 상공을 날다가, 경계 작전 중이던 미국 해군 이지스 구축함 빈센스 호가 발사한 함대공 미사일에 맞아 격추되었다. 290명 몰사. 미국은 전시상황의 과도한 긴장감으로 승조원이 여객기를 전투기로 오판했다고 납득할 수 없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빈센스 호를 구한 승조원의 영웅적 행동’에 메달을 수여했다.


이 두 가지 ‘만행’의 정도는 엇비슷하다. 미군의 ‘만행’ 쪽이 인명 살생 수에서 21명이 더 많다. 미국 내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95%가 소련의 대한항공기 격추는 ‘만행’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미국인의 74%가 이란항공기 격추는 “이란 기장에게 책임이 있다”고 확언했다.


1991년에 미국 언론학자 로버트 엔트만은 본질적으로 유사한 두 여객기 격추 사건을 예시하면서, 언론이 차별적· 편파적으로 보도하는 태도를 이른바 ‘틀짜기'(프레이밍 Framing) 이론으로 규정했다.


그는 미국 언론이 소련의 대한항공기 격추를 소련의 ‘비윤리적 폭거’라고 틀을 짜서 규정하고, 미국의 이란 여객기 격추는 단지 하이테크와 연관한 기술상의 문제에 연유한 ‘과실’이라고 틀을 지어 옹호한 점을 지적했다. 같은 짓을 미국이 하면 로맨스가 되고 소련이 하면 불륜이 되는 격이다. 뒤따라 샨토 아이옌거 등은 걸프전 보도에 나타나는 미국 미디어의 선동성을 지적하여 ‘틀짜기 이론’을 뒷받침했다.


 ‘사대두(死對頭)’ 닭싸움하는 한국 언론


중국어를 차용하자면, ‘사대두(死對頭)’라는 말이 있다. 수탉이 싸울 때 서로 대가리를 들이대며 죽기로 싸우는 꼴을 말한다.


한국 언론의 좌우가 파당을 지어서 ‘틀짜기’로 싸우는 모양이 그렇다. 특히 작금에 언론관계법을 둘러싸고 벌이는 이전투구는 ‘틀짜기’가 너무 심해 누가 ‘불륜’을 저지르고 누가 ‘로맨스’를 즐기는지 헷갈린다.


미디어는 의제를 만들면서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호의적이거나 비호의적인 편견을 드러낸다. 다시 말하면 현실의 어떤 측면은 선택적으로 강조하여 수용자에게 설명하는 반면, 다른 측면은 무시하고 소홀히 하는 성향을 가졌다.

 

좌익정치를 묘사하는 데 사용하는 ‘진보적(프로그레시브)’이라는 표현도 틀짓기의 한 예다. ‘진보적’이라는 언어는 '개혁, 개선, 전진'의 능동적 의미를 가진다. 대립한 우익정치 노선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는 '보수적'이라는 표현은 '퇴보, 기득권 유지, 과거지향' 따위 부정적인 것이 된다. 친생명적(프로-라이프)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그 반대편에 서면 반 생명, 친 죽음의 기득권자가 된다.(오미영·정인숙 지음 '커뮤니케이션 핵심이론'중 ‘틀짓기 이론’ 에서)


미국 언론의 경우 1980년대 초반 이래 ‘이념적 편향’의 구설을 듣고 있다. 미국적 기준으로 ‘리버럴’은 자유주의적 진보 좌파요 민주당지지 세력이다. 그 반대편에는 말할 것도 없이 공화당을 지지하는 보수파(컨서버티브)가 있다. 이 방면의 개척적인 연구가인 조지 워싱턴 대학의 로버트 리히터 교수는 1980년 미국의 유수한 언론 매체 종사자를 조사해서 언론인들이 얼마나 좌편향 했는가를 밝힌 일이있다.


미국에서는 언론인의 이런 좌편향을 이른바 ‘자유주의적 편견(리버럴 바이어스)’이라고 한다.


한국 정치언론의 현주소는 개혁·진보적 편견과 보수·수구적 편견이 ‘사대두’ 닭싸움을 한다는 풍자적 생각을 하게 된다.


‘개혁 편파’ 개혁했어야 언론개혁이…


한 중견 방송인은 방송 진영이 ‘공정성’과 ‘정당성’을 혼용하고 있다고 비판적으로 말한 적이 있었다. 여기서 ‘정당성’은 “의(義)를 옳다”하는 언론의 옹호와 주창에서 비롯한다.


그러니 기준점이 전혀 다른 양측 언론이 서로 ‘공정성’을 다투며 대치한들 합의점이 나올 리 없다. 그들은 전혀 다른 두 세계 사람들이다.


‘사대두’ 닭싸움을 벌이는 좌우 양파에게 인과율에 비추어서 각각 차례로 묻는다.


좌는 어찌하여 스스로를 성찰하고 개혁하여 악폐를 극복함으로써 훗날에 대비하지 않았는가? 왜 권력을 잡았을 때 미리미리 ‘공영방송’의 기틀을 잡아놓지 않고 코드인사만 구가했는가?


그리고 우는 설사 좌가 스스로를 개혁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어찌하여 내용이 수상쩍기 짝이 없는 ‘언론관계악법’을 꺼내들고 힘으로 밀어붙이려고 덤비는가? 그런 돌파만능주의 체질이 용산구 한강로의 철거민 참사를 초래한 것이 아닌가?


ann-bc@hanmail.net


Posted by 안병찬 안병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