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답사기

[답사기] ① ‘중국인이 보는 안중근 의거’

‘중국인이 보는 안중근 의거’

거사 100주년, 현장을 가다

□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 응징하는 순간(하얼빈 안중근기념관 소형조각)

서명훈 선생의 집대성

올해는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
안중근 의거의 행적을 찾아가는 관훈클럽 해외 문화유적 답사여행에 합류해 안 의사의 모습을 새롭게 보았다. ‘대한국인 안중근’이 하얼빈 역두에서 조선침략의 원흉이며 동양 평화를 파괴한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한 후 러시아어로 “코리아 우라!(대한국 만세!)”를 삼창하고 러시아 헌병에 체포된 날은 1909년 10월 26일.
우리일행은 하필 ‘경술국치일’을 사흘 앞둔 8월 26일에 중국의 여순감옥과 여순법원을 찾았다.
일행이 하얼빈으로 옳긴 것은 8월 27일 저녁. 소피텔 호텔에서 열린 세미나는 열기로 달아올랐다.

주제 발표자는 하얼빈시 조선민족사업촉진회 서명훈 명예회장. 78살의 이 전문연구자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안중근 의거가 중국인들을 얼마나 뒤흔들었으며 어떻게 깨달음을 주었는가, 촘촘히 수집한 자료로 알려주었다.

그는 그때의 실정을 밝히기 위해 베이징•상하이•텐진•우한•광저우•선양•장춘•홍콩 등 각지의 도서관과 문서보관소를 뒤지고 다녔다고 한다. 집대성한 자료는 신문보도, 사설, 시사평론, 저명인사의 제사(題詞), 문인들의 찬사, 안 의사 전기, 이토 히로부미 전기 등 400여 편에 달한다.

손중산 양계초 주은래에서

중국의 국부 순중산(孫中山)은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를 듣고 다음과 같은 글로 찬양했다.

공은 삼한을 덮고 이름은 만국에 떨치나니
백세의 삶은 아니나 죽어서 천추에 빛나리
약한 나라 죄인이요 강한 나라 재상이라
그래도 처지를 바꿔놓으니 이등도 죄인되리


중국 근대사의 정치가요 사상가인 량치차오(梁啓超)는 안중근은 해와 달처럼 영원할 것이며, 자기는 사마천이 안자를 추모하듯 살아서 안중근을 존경할 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그 무덤 옆에 나란히 묻히겠다며 우러르는 마음을 표현했다.

폭풍이 야수마냥 울부짖고
싯누런 흙모래 대지를 휩쓸 때
흑룡강 연안에 눈보라 휘날리고

북국의 엄동설한 살을 에는데
그 사나이 지척에서 발포하니
정계의 거물이 피를 쏟았네
장하다 그 모습 해와 달 마냥 빛나리
(후략)


신중국 건설의 주역인 저우인라이(周恩來) 총리는 안중근 의거를 중국과 조선 인민의 공동투쟁 서막이라고 평했다.

“중일 갑오전쟁 후 일본제국주의 침략을 반대하는 중조인민 공동투쟁은 본세기 초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한 때부터 시작되었다.”


□ 안중근 흉상 앞에서(하얼빈 안중근기념관)

장개석 장태염 원세개 풍옥상까지

모두 아는 바와 같이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쓴 휘필 ‘장렬천추(壯烈千秋)’안중근의사기념관에 걸려있다.
중국 근대 민주혁명가이자 사상가인 장타이옌(章太炎)은 ‘아시아주 제일의협(亞洲第一義俠)’이라는 글로써 안중근을 찬양하고 ‘안군비(安君碑)’도 집필했다.
심지어 북양대신 웬스카이(袁世凱)와 군인 정치가 펑위샹(馮玉祥) 그 외에 수많은 인사가 안중근을 찬양하고, 주은래 부인이 된 덩잉차오(鄧穎超)는 일찍이 1910년에 상하이에서 창작 화극 ‘안중근 이토 사살’에서 안중근 역을 연기한 기록도 나온다.
(서명훈 발제문에서)

“나도 순흥 안 씨요”

개인적으로 나는 안중근 의사와 같이 순흥 안씨 제1파(큰댁) 혈통인 것에 무한한 자긍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1910년 경술국치에 통분하여 자결 순국한 조부 위당(偉堂) 안숙(安潚)의 충절(독립훈장 애국장 추서)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원로 중견 언론인으로 구성된 답사일행은 감히 ‘순흥 안씨’라고 자기소개를 하는 나를 웃음과 박수로 대해준다. 일행은 누구나 안중근의 웅혼한 위업 앞에 감격하며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을 되풀이 했다.

Posted by 안병찬 안병찬 기자